[ 경건칼럼 - 2021년 03월 07일 ]
꺾이지 않는 간구
1. 본문의 배경
본문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장면을 통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의 모본을 보여주십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마음을 녹이는 기도였던지 예수님의 진액이 모두 빠져나가고 그 땀 안에 피가 맺혀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연약함을 경험할 수 없으신 분이셨지만 그분의 하나님 되심은 사람 되신 인성에 감추어진 신성이어서 인간의 연약함을 육체 속에 취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요인들을 경험하십니다.
2. 예수님의 꺾이지 않는 간구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항상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셨지만 이 순간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히 은혜를 구하고 계십니다.
1) “기도하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갈망한다면 그 갈망은 삶의 여러 방면에서 숨길 수 없이 나타날 것이고 그것은 특별히 기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두고 이 땅에 계실 때 힘쓰셨던 중요한 사역에 몰두하시지 않고, 은밀하게 하시던 사역인 기도에 복귀하십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자신의 자원만으로 이 상황을 이길 수 없고,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절대적인 자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반드시 기도합니다.
2) “힘쓰고 애써”
힘을 쓰셨다는 것은 실제로 육체의 힘을 쓴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육체의 힘을 소진하는 일 없이는 절실하고 간절한 기도가 불가능함을 의미합니다. 영혼은 복종하는 육체를 통해 힘을 얻게 되고 영혼은 더 간절히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은 분명한 목표도 있고, 그 마음도 진실하지만 육체를 다루지 못해서 계속 반복해서 미끄러지고 실패를 반복하기 때문에 육체를 영혼의 뜨거운 갈망으로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혼의 열렬함으로 육체를 복종시키며 사는 것은 고난을 동반하는 삶이지만 그 때마다 연약한 육체를 영혼의 열렬함으로 굴복시키셨던 참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이셨던 예수님을 생각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면 육체의 한계를 이길 뿐만 아니라 영혼이 정결하게 되는 결과까지 오게 됩니다.
3) “더욱 간절히”
‘더욱 간절히’에 해당하는 희랍어 ‘엑테네스’는 어떤 장애가 있어도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쭉 뻗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간절함은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함은 모든 장애를 뚫고 뻗어나갔기 때문에 그 기도로 십자가에서 능히 승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간절함은 장애를 극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고, 모든 악조건을 물리치고 최후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3. 지속적인 간절함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아시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연약함을 연민하는 성도들을 찾아가시지 않습니다.
환경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편안함을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의 욕심을 죽이고, 예수님의 모본을 생각하며 힘닿는 대로 우리 자신을 이기며 주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면 사람들은 기억해 주지 않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좋은 신자로 주님을 섬기는 방법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자기 복종 없이 저절로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는 지속적인 헌신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성화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인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스펄전과 함께 QT - 2021년 03월 07일 ]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한복음 3 : 7)
중생은 구원에 있어서 아주 기초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거듭났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거듭났으면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중생하지 않았으면서 자기 혼자 중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해서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난다든가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으로 인정되는 것, 이런 것은 중생이 거기 첨부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인간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알고 느낄 수 있는 변화입니다. 즉 거룩한 행위에 의해 알려지고 은혜로운 체험에 의해 느낄 수 있는 변화입니다.
중생은 초자연적인 위대한 역사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어떤 작용이 아닙니다. 대신 가슴 속에서 역사하고, 영혼을 새롭게 하며, 그 전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한 새로운 원리가 그 사람 안에 불어넣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이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본성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체를 깨끗이 씻겨 옷을 입히는 것과 그 시체를 살아나게 하는 것은 전혀 별개입니다. 그런데 전자는 인간이 할 수 있고 후자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거듭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오 주 예수님,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제 영혼의 아버지십니다. 주님의 영이 제 안에 이 새롭고 거룩한 영적 생명을 불어넣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오늘까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을 것입니다. 저의 천국 생활은 전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덕분입니다. "제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인 바 되었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십니다." 주여, 우리가 지극히 중요한 이 사실에 대해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중생하지 않은 것은 곧 구원 얻지 못한 것이요, 용서받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도 소망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J.I패커와 함께 QT - 2021년 03월 07일 ]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 3 : 13)
죄의 속임수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유혹은 우리의 기질상의 약점과 강점을 모두 이용한다. 죄는 우리의 지성을 사악한 일종의 상황 윤리에 빠뜨린다. 그에 따라 우리는, 무엇이든 다른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것이 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내가 지금 하기 원하는 것이 지금 나에게 아주 적절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한 죄는 우리의 지성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열려 있는 일들을 화려하게 보여 줌으로써 우리를 유혹하고, 이성과 양심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한다. (후에 우리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우리가 얼마나 옳은지를 말할 것이다.)
사람들을 이용하고 교묘하게 조작하여 속이며 책임을 회피하고 선의를 억누르고 적개심을 분출하는 죄는 보통 미혹된 마음에서 비롯된다. 즉 성적인 죄들과 탐욕, 폭력은 보통 일시적으로 유혹에 빠진 마음, 그리고 술이나 마약이나 피로가 가져올 수 있는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것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1981a:81, 82).
묵상: 죄는 미혹된 마음에 밀려들어온다.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1년 03월 07일 ]
어린이는 교만 탐지기와 같다
선교 사역의 자격이 있는지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주목해보라. 아이와 방안에 함께 있을 때 관찰해보라. 예수님께서도 어린이를 소중하게 생각하셨다. 어린이는 어른의 마음속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 있는지 그 여부를 실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교만하지 않은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가르쳐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3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충격적인 말씀도 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더 크냐” 고 서로 쟁론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불러,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고 안으며,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 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막 9:34-37).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길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는 그가 하나님과 어떤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 보여준다. 겸손한 마음으로 어린이를 사랑하고 안아주지 않는 어른의 영혼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어떻게 다루셨는지 염두에 두고 다음에 나올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이 중요한 일을 하려면 어린이 선교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1. 예수님께서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사 9:6).
2.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안고 축복하셨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4-16).
3. 예수님께서는 이방 여자의 딸을 고쳐주셨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4. 예수님께서는 아이에게 들어간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마 17:18).
5. 예수님께서는 죽은 아이를 살리셨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41-42).
6.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갖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요 6:9-10).
7.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같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
8. 아이들은 예수님을 호산나로 맞이했다. 대제사장들과 …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마 21:15).
9.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죽음에 넘겨주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막 13:12).
10.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은 성자와 성부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어린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맞아들이고 영접해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육원을 운영하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일이다.
[ 은혜와 사명 - 2021년 03월 07일 ]
참된 사명자는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될 것이라는 허황된 낙관에 빠져 긴장을 늦추는 법이 없습니다.
[ 성구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 내용 ]
참된 사명자는 열심히 하기만하면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될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이 사명자를 공격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루아침에 자신의 사명을 팽개치고, 세상을 좇아 나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도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압니다. 사탄이 기대하는 것은 사명자가 자신의 사역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자신이 사명의 자리에 온 마음을 쏟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적과 전투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특공대원이 되어 적의 진지 바로 앞까지 갔습니다. 가서 보았더니 흩어져서 쉬고 있는 병사들도 보이고, 삽을 들고 일하는 병사들도 보이고, 밥을 짓도 있는 취사병도 보이고, 환자를 돌보고 있는 위생병도 보이고, 총을 들고 경계태세에 돌입해 있는 병사도 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제일 먼저 누구에게 총을 겨누시겠습니까? 순식간에 적의 전력을 무력화시켜야 하는데, 누워서 자고 있는 사병을 먼저 쏘시겠습니까? 적의 부대를 괴멸시키기 위해 집중사격을 가해야 될 사람은 총을 든 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전투를 대비하고 있는 병사들입니다.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겨냥합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자신을 향해 악한 공격이 시작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여러 가지 훼방과 시련 속에서 지혜롭게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일의 귀한 모본을 찰스 스펄전 (Charles H. Spurgeon)에게서 배웁니다. 찰스 스펄전은 분투하는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오십대 중반으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끊임없는 복음 전파와 목회 활동, 각종 신학 연구와 저술 활동으로 숨 가쁜 나날을 살았습니다. 정말 그 사람만큼 쉴 새 없이 바쁘게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불고하고 그는 결코 일에 허덕이며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병약한 부인을 뒤로하고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그 순간에 이렇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여보, 나는 그토록 오랜 동안 그 분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오.” 일을 붙들고 산 사람들은 일에 성패에 따라 요동하고, 사람에 매여 산 사람은 사람들과 함께 변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인생의 동기가 된 사람은 어떠한 시험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고난과 시련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을 누릴 기회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조차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일생의 그리움이 실현되는 행복한 시간이기에,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 묵상 ]
사명자가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의 현재적인 경험 속에 사는 것입니다. 헛된 명예욕이나, 일에 대한 맹목적 열심 등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하나님께만 사로잡혀 그 분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사명자가 자신을 지키는 최선의 비결입니다.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1년 03월 07일 ]
그리스도의 십자가 - 아이작 왓츠
그러나 인간을 구원한 그 은혜 속에서
그의 가장 찬란한 영광이 빛나네
여기 십자가 위에서 보혈과 진홍빛 선으로
그 영광이 가장 잘 그려졌네
여기에 그의 이름 모두가 완전히 드러나건만
어느 이름이 가장 잘 보여졌는지는
지혜로도 깨닫지 못하고, 이성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네
능력인지, 지혜인지, 아니면 사랑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