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4년 03월 30일 ]
사명을 위한 분투
1. 신자가 받는 고난
인생을 사는 목표가 없는 사람은 사는 동안 고생은 겪어도, 고난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고난이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겪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옥에 갇혀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29절)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신자는 어떤 목표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도 함께 받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신자의 삶에는 반드시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면 그것이 바로 신자의 목표가 됩니다. 그리고 사명과 사명을 주시는 목적은 수시로 발전해 갑니다. 구약 시대 요셉은 종의 신분에서 집사로, 집사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각각의 자리에서 사명이 발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충성된 종에게 점점 더 큰 사명을 맡기십니다. 받은 은혜를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자신을 존귀하게 함은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참으로 아름답게 받으십니다.
2. 목표를 방해함 : 두 저항
은혜가 사명이 되고, 사명이 목표가 되는 과정에는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목표를 따라 살려고 할 때 부닥치는 저항은 두 가지인데, 첫째로 역방향에서 오는 저항입니다. 이 세상의 끊임없는 유혹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유혹과 싸우는 거룩한 외로움이 커집니다. 둘째로 순방향에서 오는 저항입니다. 생명을 다해 일하려 하여도 육체의 연약함이 일을 더디게 하는 경유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더욱 의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이 주님께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요 특권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고난을 특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3. 잘하였다, 착한 종아
주를 섬기는 일에는 충성됨과 더불어 일을 ‘잘’ 감당한 ‘착한’ 종이어야 합니다. ‘착한’ 것은 인격의 상태를 말하며, ‘잘’ 한 것은 주님의 마음에 흡족하도록 지혜롭게 행한 상태를 말합니다. 지혜 없이 충성만 있으면 주님의 마음에 근심을 끼치며, 지혜는 있으나 충성되지 않으면 주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연습 없이 하루하루가 실전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길이는 덧없이 짧습니다. 감당할 일이 무엇이든지, 맡기신 분이 주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며, 육체를 더러운 대로 내던지는 삶을 사는 이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밝은 빛 아래에서 드러내실 것입니다.
희어져 추수할 것이 많아서, 주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사명을 맡겨주셨는데, 우리가 감당치 않으면 주님께서는 너무나 슬퍼하십니다. 우리를 인생의 벼랑 끝에서 건져내신 그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마음은 정욕과 세상 사랑에 뒤엉켜 있고, 몸으로만 예배드릴 때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착한 성도가 되어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주님은 지푸라기와 같이 힘없고 연약한 우리이지만, 받은바 은혜로 이 세상 어느 모퉁이에서 그 사명을 붙들고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 일을 잘 감당하도록 은혜와 건강, 자원 등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마음은 부패하고 사명은 내팽개친 육적인 삶을 살아갈 때, 결국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아끼는 자 없이 죽었더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군사, 그리스도인
성도 여러분은 사명을 다하려는 간절함으로 가슴이 떨리십니까? 간절함이 없다는 것은 기도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어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처절한 고백은 가슴을 찢으며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수 없고 늘 같은 자리인 듯한 신앙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 전쟁터에서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을 받는 군사의 삶입니다. 영적 군사로서 이 세상의 고난과 맞서 싸우며 주님께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싸움 없는 삶은 곧 타락한 삶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자리로 돌아가 싸우는 참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 스펄전과 함께 QT - 2024년 03월 30일 ]
“이는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이사야 53 : 12)
예수님은 왜 죄인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림 받는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주님이 이처럼 자신을 낮추신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죄인들을 위해 보다 나은 대변자가 되시기 위해 죄인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으셨습니다. 변호사와 의뢰인을 동일시하는 심문에서는, 법적으로 그 둘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법정으로 끌려올 때 예수님께서 친히 그 법정에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그 죄인에 대한 고발에 답변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재판관에게 자신의 옆구리와 손발을 내보이시며 자기가 대변하고 있는 그 죄인들에게 불리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다 가져오라고 도전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이 흘린 피를 가지고 그들을 위해 탄원하십니다. 그들 중 한 사람으로 헤아림을 입고 그들 편이 되어 탄원하십니다. 마침내 재판관은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그들이 지옥 구덩이로 내려가지 않게 구원하라. 이는 그가 속전을 지불했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주님이 승리를 거두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으셨을까요? 그것은 죄인들인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끌어당기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죄인 명단에 적힌 분을 누가 두려워하겠습니까? 틀림없이 담대히 그분에게 가서 우리의 죄를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헤아림을 받은 그분은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범죄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신 것은 바로 피로 물든 성도들 명단에 우리 이름이 적히게 하시려고 그렇게 한 것 아닙니까? 주님은 본래 거룩하신 분으로 거룩한 자들 가운데 그 이름이 적혀 있었으며, 우리는 죄인들로 죄인 명부에 그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거룩한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내어 이 검은 고소장으로 옮겨 적으시고 그 고소장에서 우리 이름을 빼내어 용납이라는 명부에 적어 넣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완전한 전이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비참을 가져가신 대신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의, 그의 피, 그 외에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지참금으로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렇게 해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은 주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제는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로 헤아림을 받음으로써 여러분이 구원받았음을 입증하십시오.
[ J.I패커와 함께 QT - 2024년 03월 30일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 : 3, 4)
구원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회심이나 거듭남 또는 중생(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었음을 확신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추구하고 애쓴 모든 과정도, 마지막 단계인 죄의 자각이나 헌신이나 확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해 잘 조정되었음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구원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한 사람의 어둠과 방황 속에 들어가신다는 생각은 자연히 현대 복음성가에서도 날카롭게 제기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일으킨다. “그러나 예수님, 왜 접니까?” 신약성경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를, 뒤를 돌아보고 위를 바라보며 죄를 범한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영원한 계획을 지적하였는데, 그 계획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서 나온 것이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는지 말해 주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감사하라고 말할 뿐이다(1992b:55, 56).
묵상: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신 것은 놀라운 은혜다!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4년 03월 30일 ]
고린도전서 11장 29-32절 묵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제일 힘들고 그분을 위해 죽는 것이 그 다음으로 힘들 것이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한데,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 설사 내가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죽는 순간에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가? 죽음이 형벌이나 멸망으로 가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는가? 사탄은 이런 의심의 씨앗을 우리들 마음속에 많이 뿌려놓았다. 우리는 사탄의 의심을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쫓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방어 도구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죗값으로 징계나 심판을 받아 병을 앓게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조심할 것은 우리가 죄를 담당해서 형벌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벧전 2:24). 나는 ‘징계’라는 말을 “죄를 꾸짖고 교정하고 정화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도록 보호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히브리서 12장 6절도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징계인가? 성경은 사도 바울을 통해 그렇다고 말한다. 바울은 주의 만찬과 관련된 죄를 다루면서 고린도전서 11장 29-32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하면 죄의 징계로 때때로 몸이 약해지거나 병에 걸리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죄를 정죄하자는 목적은 아니다. 정죄는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시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롬 8:1). 따라서 그 목적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고전 11:32). 즉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죄로부터 구원하려고 징벌 성격의 죽음도 내리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가운데는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많다(30절). 물론 성도들의 죽음이 모두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병이나 죽음이 죄에 대한 징계일 것이라고 성급하게 결론내리지 말라. 그러나 정말로 죗값으로 죽는 일이 있다고 상상해볼 수는 있다. 이것을 알고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갖고 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롬 15:4).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소망이 충만한 가운데 죽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굳세게 해주고 있는가?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뀔 수도 있다. 죄인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평화로운가?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기에 원하면 병을 낫게 하실 수도 있는데 병이 낫지 않고 계속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죄인이고 우리 속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가? 두려운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구원하신다는 성경 말씀 속에서 위로를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룩하기 때문에 비록 자녀들이 지은 죄라 하더라도 그것을 미워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징계로 연단하신다(히 12:11).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연단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지극히 현실적인 도움과 소망을 찾는 것이다. 그 위로의 말씀이 고린도전서 11장 32절이다. 즉 성도가 심판과 징계로 죽더라도 이것은 정죄가 아니라 구원이라는 메시지다. 하나님께서는 죄짓는 성도를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죄 가운데 있는 것을 그냥 보고 계실 수만은 없다. 그래서 그 성도의 생명을 취하시는 것이다.
이 진리는 확실히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쉬운 내용도 아니고 교회에서 항상 가르치는 소재도 아니지만 확고한 진리다. 성경의 가르침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죽음이 죄 때문인지 마귀의 시험때문인지(계 2:10) 또는 하나님의 다른 목적 때문인지 일일이 확인할 필요는 없다. 설사 죄 때문에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죽는 순간에 설사 내가 징계를 받아 죽더라도 하늘나라에 가서는 정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
[ 은혜와 사명 - 2024년 03월 30일 ]
사명자도 때로는 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명자를 반드시 회복시키십니다.
[ 성구 ]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 내용 ]
빼어난 기량을 가진 달리기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코치를 만나 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법들을 배워갔습니다. 그리고 출전하는 경기마다 좋은 성적을 거두며, 빠르게 성장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큰 경기에 출전해, 모든 사람들의 기대대로 가장 앞서 달리던 그가 코너를 돌다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뒤 따르던 선수들이 모두 그를 앞질러 가는 데도,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주저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트랙에 엎드려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빨리 달리는 법만을 훈련받았을 뿐, 넘어졌을 때 일어서는 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하였음을 말입니다.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잘 달리는 법 뿐 아니라, 달리다가 넘어졌을 때 잘 일어서는 법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사명자가 되기 위해서는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큰 넘어짐을 경험한 두 사람이 있는데, 바로 베드로와 가룟 유다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실패로 인해 영벌에 이르렀고, 베드로는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두 사람의 실패에 현격한 질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실패하는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만 유약한 인간이기에 사랑하면서도 넘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넘어질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명자는 그러한 때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실패했고, 어떤 일들로 넘어졌는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현재적으로 여러분 안에 있느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패한 베드로에게서 원하셨던 것은 실패에 대한 구구절절한 반성문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나 자주 넘어지고, 너무나 자주 실패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구절절한 변명 대신, 사랑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는 성도들을 일으켜 세워, 다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 묵상 ]
참된 사명자도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변함없는 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를 회복시키십니다. 실패와 낙담 속에 계십니까?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넘어진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시고 커다란 사명을 맡기신 그 분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4년 03월 30일 ]
구원얻는 방식 - 존 오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는 목적과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자, 그것이 바로 구원얻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지혜, 하나님의 선함, 하나님의 사랑, 선하심과 은혜, 그리고 긍휼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바로 그 전부입니다.
우리 영혼의 생명이 바로 그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선하심과 긍휼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의 조직 유일한 갈과 방편으로 지명되셨습니다. 그러니 믿는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가 얼마나 놀라운 영광을 지니신 분으로 보여야 마땅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