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4년 04월 25일 ]
지식과 은혜
1. 본문 해설
아볼로는 후에 고린도 교회를 섬기며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입니다. 유대인인 아볼로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풍부한 학문과 학예를 익혔으며, 성경에 능하고 하나님의 도를 깨달아 하나님의 도를 전파하는데 열성적이었습니다. 아볼로는 ‘학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학문에 능했기 때문에, 성경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지성의 깊이에 좌우됩니다. 탄탄한 교리의 토대 위에서 성경을 읽어야 성경의 인식이 더욱 확장되어집니다. 신앙은 열렬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려고 노력하며 성경을 살피면, 성경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는 이치 또한 깨달아 잘 알게 됩니다.
2. 이성과 지식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지만, 인간에게 주신 이성을 사용하여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 중에서 특별히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고, 인간의 이성으로 하위의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위의 피조물은 인간에게 봉사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것에 기여함으로써 온 세상의 창조의 질서들이 바르게 세워집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성으로써 학문 분야의 넓이와 폭을 확장해 갈 수 있습니다. 학문을 공부하여 학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이에 따라 이성의 능력이 증대됩니다. 이성의 능력이 증대될수록 많은 성경 계시를 담을 지적인 그릇이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 좋은 신앙을 갖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이성적인 요소로는, 첫째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분명한 인정, 둘째로 자신의 이성으로 모두 깨달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아멘’ 하고 받아들이는 견고한 믿음, 셋째로 이성에 대한 신뢰함으로 추론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견고한 신앙의 사람으로 자리 매겨가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은혜를 경험함
아볼로는 ‘열심으로’ 진리를 가르친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그는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어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청중들 가운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가르침을 경청한 후에, 그를 데려다가 예수의 도를 더 풍성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기 때문으로, 세례 요한이 소개하고 알려 주었던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아는 경험이 없었습니다. 아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그분의 부활과 승천, 성령 강림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볼로가 체험하지 못한 성령세례를 경험하였고, 아볼로가 알지 못하는 진리들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의 경험적 요소입니다.
다시 말해 아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깊이, 그분의 부활의 신비, 성령께서 인치신 역사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고, 브리스길라 부부는 그의 경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동역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성령 강림을 통해 깨닫게 된, 성령이 증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체험적인 증거를 통해서 말씀의 새로운 도를 풀어주었을 때, 아볼로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4. 결론과 적용
결론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첫째로 교리를 꾸준히 공부하여 지성적 발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둘째로 열렬히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경험할 수 있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배운 성경의 의미를 성령의 은혜로써 체험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성을 사용하여 참된 것을 찾는 ‘진’, 마음에 착한 의지를 가지고 올바르게 사는 ‘선’,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본분을 찾는 ‘미’, 이 세 가지는 기독교 신앙 안에 성취됩니다. 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있어야 선한 삶이 뒤따르고, 그 결과로써 아름다운 존재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며, 또한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인 외에 세상에는 진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세상 보화를 얻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찾는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 스펄전과 함께 QT - 2024년 04월 25일 ]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2 : 10)
보십시오.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온 땅이 화창한 날씨로 환히 빛나고 있다. 삼라만상이 우리를 겨울잠에서 일어나라고 깨우고 있는 이 때, 주님 역시 우리가 영적으로 잠자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일어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그 동안 세속이라는 단지 속에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었으니 주께서 그렇게 명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주께서 부활하시고 우리도 주님 안에서 부활했는데 왜 그 먼지 속에 착 달라붙어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열등한 사랑이나 소욕, 열등한 추구나 야심들로부터 일어나 주를 향해 갑시다. 주님은 우리 각자를 "나의 사랑"이라고 부르실 뿐 아니라 정말 어여쁜 자로 여기십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일어설 만한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주께서 우리를 이처럼 높이시고 어여쁘게 생각하시는데, 어떻게 게달의 장막에서 꾸물거리며 인생들 가운데서 마음에 맞는 친구를 발견하려 할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함께 가자"고 명하십니다. 이기적이요 야비하며 세상적이요 죄된 모든 것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렇습니다. 외관상으로는 주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주를 모를 뿐 아니라 고상하고 신비한 삶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형식적인 종교계로부터 떠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께서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소리가 전혀 거슬리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이 헛되고 죄악된 광야에 우리를 붙잡아 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저희도 주님과 함께 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께서 저희를 가시들 가운데서 취하셨으니 저희가 아무리 원해도 그 가시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가시로부터 도망칠 수만 있다면 저희는 죄를 보지도 듣지도 생각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면서 저희에게 주님께 오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의 그 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음악소리처럼 들립니다. 주님께 가는 것은 유배지에서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노도 치는 폭풍우 속을 빠져 나와 육지로 향하는 것이요, 오랫동안 수고한 후 안식을 취하러 가는 것이며, 사실 저희가 가장 소원하던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돌이 어떻게 스스로 일어설 수 있으며 진흙덩이가 어떻게 그 끔찍하고 무서운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까? 그러니 저희를 일으켜 끌어내 주십시오. 주님의 은혜로는 그것이 가능하오니 주의 성령을 보내시어 저희 마음속에 거룩한 사랑의 불을 붙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이생과 시간을 뒤로 한 채 정말 주님과 함께 가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나겠습니다.
[ J.I패커와 함께 QT - 2024년 04월 25일 ]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시 119 : 133)
일단 주님을 발견한 사람은 어떻게 자신에게 적절한 사역을 발견하는가? 보통 이 과정에는 네 가지 요소가 함께 등장한다. 그것들을 한 가지씩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성경의 요소가 있다. 성경은 넓은 의미에서 방향을 지시해 주며, 목표들과 지침들과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가치의 저울을 우리 앞에 둔다. 성경은 일반적인 용어로, 행할 가치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하나님이 장려하시는 활동과 막으시는 활동, 그리고 성도들과 죄인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일들을 말해 준다.
이런 범위 안에서, 이런 목표들을 추구하고, 이런 우선순위들을 준수하면, 당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도록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성경의 요소는 기본적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범위를 벗어난 인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누군가 성경을 손에 들고 우리가 속고 있다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1995a:55).
묵상: 나의 참된 사역은 성경의 지시 및 우선순위와 조화를 이룰 것이다.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4년 04월 25일 ]
새 언약을 훼손시키려는 주장을 경계하라
하나님은 인간의 취사선택을 미리 아실 수 없다는 그릇된 주장이 가끔 나오곤 한다. 그런 사람들은, 취사선택은 자유이고 자유는 스스로 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취사선택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도 미리 아실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이 취사선택을 하기 전에는 취사선택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기에 하나님께서도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실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철학적 전제 조건도 많다.
첫째, 자유는 스스로 하는 것이다.
둘째, 인간의 취사선택은 자유다.
셋째,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취사선택하지 않은 것은 아실 수 없다 등. 철학에서 시작된 이 주장은 성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이 최근에 논리학이 요구하고 성경도 용납하는 학문적 움직임에 대해 쓰기도 했다.
여기서 순서를 주목해보자. 논리학이 요구하고 성경도 용납하는 순서다. 그러나 논리학이 요구하면 성경이 따라가 추인하는 것은 잘못된 순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취사선택을 미리 아실 수 없다는 주장은 기독교 정통 교리에 맞지 않는다.
칼빈주의자들이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취사선택을 완전히 그리고 확실하게 미리 아신다고 주장해왔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또한 자코부스 아르미너스(Jacobus Arminious)는 이렇게 썼다.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인은 믿고 어떤 성도는 인내해야 하는지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선택을 미리 아실 수 없다는 주장은 기독교 정통 교리에 맞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새 언약의 기초를 부정하고 있다.
이 새 언약은 모세, 예레미야, 에스겔이 예언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을 치르고 제정됐다(눅 22:20). 사도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이었다(고후3:6). 이 새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언약의 백성들이 믿음과 순종에 대한 계약 조건들을 이행하도록 돌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주신 옛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셨고(출 34:6-7) 믿음에서 우러나온 순종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변화 받는 은혜는 몇 사람에게만 주셨고 대다수의 백성들에게는 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대신 새 언약에 의해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11:19-20, 36:27).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
다시 말하면 새 언약은 우리 소망의 기초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여 죄를 짓기는 하지만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내하여 마침내 구원받게 될 것이다.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우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것을 믿을 수 있다(유다서 24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어떤 취사선택을 할지 미리 알지 못하신다면 새 언약에 명시된 소망은 어떻게 되는가? 언약의 기본 틀은 망가지고 기초는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성결을 지킬 수 있도록 역사하겠다고 새 언약을 통해 약속 해주셨다. 즉 성도들이 성결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마음먹고 행하도록 우리 속에 역사하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겠다는 뜻이다(빌 2:13, 히 13:21).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아실 수 없다면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져야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가로 이 약속이 이루어지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새 언약의 약속을 훼손하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훼손하는 주장이요, 성령님의 활동을 약화시키려는 주장이다. 주님, 이런 잘못된 주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고 새 언약 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생활하도록 도와주소서.
[ 은혜와 사명 - 2024년 04월 25일 ]
참된 사명자는 사명을 위한 헌신을 수고로 여기지 않고 특권으로 여깁니다.
[ 성구 ]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
[ 내용 ]
1813년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10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17세 때 강력한 소명을 받고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중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런던선교회에 가입한 그는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머펫을 만나게 되고, 공부를 마친 후 머펫 선교사의 딸 메리와 결혼하여 아프리카로 떠나기에 이릅니다.
1840년 워터프런트 항구에서부터 아프리카 사역을 시작한 리빙스턴은 1년 쯤 그곳에서 사역을 하다가 머펫 선교사의 사역지 쿠르만(남아공과 보츠와나 접경지역)으로 이주합니다. 그 후 탐험가적 기질과 개척자적 정신에 따라 한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아프리카 곳곳을 탐험하며 후임 선교사들이 사역을 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습니다.
1871년. 그의 몸이 많이 쇠약해지자 영국 왕실과 그의 친구들은 은퇴를 종용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은둔해버렸고, 이에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탐험가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를 동원하여 그를 찾게 했습니다.
리빙스턴을 만난 스탠리는 은퇴 후 좋은 조건에서 살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는 영국 왕실의 제안을 전하며 “30년 동안 헌신하셨으니, 이제 그만 헌신의 삶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리빙스턴은 조용히 거절하며 “아프리카 선교는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보답입니다. 차라리 이것은 특권이며 영광스러운 내일을 기대하는 희망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년 후, 그의 제자들은 침대 위에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품에 안긴 리빙스턴을 발견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이렇게 그의 나이 60세 때 무릎 꿇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삶을 하나님께 무엇인가 시여하며 살고 있는 삶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오만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섬김을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 드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우리는 참된 사명자일 수 없습니다. 섬길 수 있다는 것조차,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섬김을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위한 헌신은 수고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참된 사명자는 사명을 위한 자신의 헌신을 무거운 짐이 아니라, 놀라운 은혜의 기회로 생각합니다. 사명의 길에 서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이 마련해 주신 놀라운 특권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 묵상 ]
여러분에게도 리빙스턴과 같은 고백이 있습니까?
“나의 이 섬김은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보답입니다. 차라리 이것은 특권이며 영광스러운 내일을 기대하는 희망입니다.” 라고 하는…….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4년 04월 25일 ]
기도 - 칼빈
1.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거절하실 때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거부하셔야 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확실해진다.
2. 기도에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곧 믿음과 겸손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일어서고 또 겸손으로 땅에 엎드린다.
3. 성경은 자주 예배의 전체를 하나님을 방문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4. 가르침과 기도, 이 두 가지는 하나로 결합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교사를 세우시고 기도에 열중하게 하신다.
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우리가 그의 지고한 위엄에 경의를 표하는 주요한 최고의 제물로 여기신다.
6. 형제들의 타락은 ... 기도하라는 자극제이다.
7. 신앙의 참된 증거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진정으로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