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4년 04월 20일 ]
섬기는 자의 영혼
1. 본문의 배경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들 곁을 떠날 것과, 보혜사 성령님이 그들에게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계명”을 언급하신 것은 이러한 이야기를 하던 과정에서였습니다.
2. “나의 계명” : 새 계명 (요 13:34)*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 계명은 하나님의 계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에 차이점은 없다는 점에서 두 계명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고, 새 계명은 구약의 계명과 달리 우리를 율법에 행위적으로 묶어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적인 불연속성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행위를 담보로 행위 언약이 맺어졌으나,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해 깨뜨려졌습니다.
행위 언약 외에 우리는 은혜 언약을 받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근거로 합니다. 은혜 언약은 인간의 타락 즉시 들어왔으며, 구약의 역사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은혜 언약은 행위 언약과 달리 죄를 이길 힘을 줍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사랑으로 섬기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기본적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바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으로써 표출됩니다.
3. 섬김의 계명을 이루는 것
a. 믿음
때때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짐을 지우시고 고난을 주시면서까지 사명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는지 납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부당한 자기사랑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당위성이 항상 우리에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믿음은 논리적으로 설득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좇을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b. 사랑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어 그의 노예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섬김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검기려면 먼저 자신의 꿈, 미래,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자기사랑을 비우지 않는 한, 참된 섬김은 없습니다.
c. 대상과 계명이 분리되지 않음
믿음의 대상은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믿는 것은 따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계명을 좇아 ‘아멘’ 하고 받아들입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대한 깊은 사랑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됩니다.
4. 섬기는 자의 영혼 : 아버지께 사랑받음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들의 영혼 위에 놀라운 영적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섬김 속에서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기독 신앙은 섬기고 헌신하는 실천의 삶 속에서 더욱 이해됩니다.
섬기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의무감으로 인해 형식적으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섬김만이 섬기는 이의 영혼에 영향을 미칩니다. 아무리 섬겨도 고난이 겹쳐온다면, 잘못된 섬김을 드리는 것임을 깨달아 회개하고, 돌아오기 바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무위도식하는 성도의 영혼은 순결할 수 없습니다. 사명을 버린 이가 번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던져 깨뜨리기 위해 높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이의 눈물을 보시고 그 존재의 사랑스러움에 눈물을 흘리십니다.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스펄전과 함께 QT - 2024년 04월 20일 ]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브리서 2 : 14)
하나님의 자녀여, 사망은 이제 여러분을 쏘지 못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잡고 있던 마귀가 멸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죽을까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성령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구세주가 여러분 대신 죽어 주신 것을 분명히 알고 그 대속의 죽음을 확고히 믿음으로써 여러분에게 사망의 끔찍한 순간이 닥쳐왔을 때 강건해질 수 있도록 대비하십시오. 갈보리 십자가 근처에 사는 여러분은 아마 사망을 기쁘게 생각하여 그것이 찾아올 때 기꺼이 환영할지도 모릅니다.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잠드는 것은 언약의 축복입니다. 사망은 이제 더 이상 유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유배지에서 돌아와 사랑하는 이들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처소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영화되어 천국에 살고 있는 영혼들과 이 땅에서 아직도 싸우고 있는 성도들은 서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향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눈 깜짝할 새에 그곳에 갈 것입니다. 돛이 펴지고 영혼은 이미 바다를 향해 떠났습니다. 그 항해가 얼마나 오래 걸릴까요? 그 영혼이 평화의 항구에 돛을 내릴 때까지 그 돛에 얼마나 많은 바람이 불어와 그를 지치게 할까요? 그 영혼이 폭풍을 전혀 모르는 평화의 항구에 닿을 때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파도에 시달려야 할까요?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육신을 떠나면 곧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저기 보이는 저 배는 방금 출발했는데 벌써 천국에 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돛을 폈는데 어느새 천국에 가 있습니다. 마치 그 옛날 갈릴리 호수에 떠 있던 배에 폭풍이 불어와 배가 흔들릴 때 예수님이 "잠잠하라"고 말씀하시자, 그 배가 즉시 육지에 닿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사망과 영원한 영광 사이에 긴 간격이 있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실은 이 땅에서 죽음과 동시에 천국에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 하나님의 자녀여, 여러분이 믿는 주님의 사망을 통해 사망의 저주와 쏘는 것이 이미 파멸되었는데, 왜 사망을 두려워하십니까? 이제 사망은 야곱의 사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다리는 어두운 무덤 안에 박혀 있지만 그 꼭대기는 영원한 영광에 닿아 있는 야곱의 사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 J.I패커와 함께 QT - 2024년 04월 20일 ]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후 10 : 12)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의 성격과 경력에 따라 다양한 환경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시고, 우리를 발견하신 바로 그 자리에서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신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달리 본래 인격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파선된 배의 가장 깊은 곳에 있으며, 각각 주어진 환경의 특성에 맞는 하나님의 구조 작업을 필요로 한다.
영적으로 건강하게 하고 성장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성화의 사역이 구체적이고 다양하게 실현되고, 그 일이 다양한 삶에서 다양한 속도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일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때 의식할 수 없는 마음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또는 아직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측정할 수 없다.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경과를 서로 비교하는 것은 무지하고 그릇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다(1992b:184).
묵상: 비교는 오해를 일으킨다. 나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4년 04월 20일 ]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삼상 2 : 22)
엘리의 아들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셨다. 결국 그들은 블레셋 전쟁에 나가 죽었다(삼상 4:11). 오늘 말씀은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오랫동안 깊이 죄를 지으면, 주님은 그 죄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 디모데후서 2장 25절에서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라고 말하면서, 사도 바울이 ‘반드시’가 아니라“혹 회개함을 주신다”고 말한 것에 주의하라. 너무 늦어 회개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히브리서 12장 17절은 에서에 대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언급했다. 그는 마음이 너무 강퍅해서 진심으로 회개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버림받았다.
그렇다고 일생 동안 죄를 짓고 회개한 사람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비한 분이다.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에게 예수님께서는“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 대로, 그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범죄의 종류나 횟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그 시점을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기회 있을 때 하나님과 서둘러 화목해야 하고(히 3:15)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히 10:26).
2. 하나님께서는 죄 짓는 사람이 옳은 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엘리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해야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목적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짓다가 죽도록 내버려두셨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계명과 달리 결정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엡 6:1)는 계명을 주셨지만 엘리의 아들들의 경우에는 그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지 않고 죄를 짓다가 죽도록 내버려두셨다.
이것은 심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성결과 의로운 목적을 위해 그들이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셨다.
3.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 기도에 대해 계명으로 보여주신 당신 뜻대로 이루어주시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지혜로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계명과 다른 일을 하시는 것이다. 제사장 엘리는 아들들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했을 것이고 마땅히 그랬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부모를 순종하라는 계명을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자녀들이 순종하도록 기도해야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순종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기로 이미 결정하셨다. 눈물로 기도하는 중에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우리 기도를 못 들었다거나, 아니면 우리 기도를 인정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현명한 목적을 이루려고 그들로 하여금 죄를 이기지 못하게 하고 회개시키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알고 있으니 나를 믿으라.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힘들어 울기도 한다. 우리는 자녀들이나 배우자나 부모나 동료나 이웃이 변화되기를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성결과 믿음과 사랑의 뜻이 그들 삶 가운데 나타나기를 기도한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주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공의와 사랑 앞에 엎드리라. 눈에서 눈물이 마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하자 (삼상 3:18).
[ 은혜와 사명 - 2024년 04월 20일 ]
우리의 인생을 후회 없이 살기 위해서는 사명에 눈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 성구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 내용 ]
“저 애는 군인의 기질을 타고 난 것 같소.” 부모가 주고받는 이 말을 들은 13세의 소년의 마음에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것은 그대로 그 소년의 꿈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소년은 꿈을 위해 현실을 소중하게 가꾸었고, 결국 세계사에 남는 “위대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군인이 된 이 소년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입니다. 그는 1951년 4월 당시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파면 당한 후 워싱턴 의회의 고별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빛’을 통해 인생의 의무가 무엇인지 알고 그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한 노병은 물러납니다.”
맥아더 장군이 당당한 고별사를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어린 시절 하나님께서 주신 “빛”으로 인해, 그는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여정을 마치면서, “다시 살아도 지금 살아온 걸음으로 살고 싶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인생의 무대에서 내려올 때 남기는 고백들은 너무도 당당합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을 앞에 두고 하는 고백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달려갈 길을 알았고, 믿음의 도리를 지켰습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의 끝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의의 면류관이었으니, 사도 바울은 그야말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노라고 외칠 만 했습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사명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맥아더 장군에게는 “빛”으로 묘사되었고, 사도 바울에게는 “달려갈 길”로 묘사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가? 내 인생이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이런 인생의 근본적인 물음을 통해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그 사명 없이 사는 것은 진정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 제게 아무리 작아 보이는 일을 지라도 내가 아니면 안 돼는 그런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려주십시오. 그것을 감당하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제 인생의 종착역에서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후회 없이 살기 원하는 자들의 기도요,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 묵상 ]
하루하루 삶이 무기력 하지 않습니까? 매일 같은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해내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십시오. 진지하고 끈질긴 성찰과 기도로 후회 없는 인생을 쟁취하십시오.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4년 04월 20일 ]
나는 - 휫필드
나는 사역을 할 자격이 없고 사역을 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나를 짓눌러, 이제 물러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나는 나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졌고, 마치 눈 멀고 벌거벗은 듯한 느낌이었으며, 그래서 사탄은 누구에게도 편지를 쓰지 말라고 나를 유혹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