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4년 04월 29일 ]
기다리시는 하나님
1. 본문의 배경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실 때,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던 이들은 스스로 의롭다 하던 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죄인이라고 믿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모였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하시며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빌미로 예수님께 항의했고,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통해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다양한 역사를 말씀하셨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특별히 하나님 안에 있던 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의 집을 떠났다가 다시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2. 하나님을 떠나서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부모님의 유산을 미리 받아내어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즐거움보다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자기 좋은 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집을 멀리 떠난 신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몸으로는 교회에 나와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1)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둘째 아들은 방탕한 삶을 사느라 받은 유산을 모두 낭비하였습니다. ‘허랑방탕하다는 말의 세상적인 의미는 말이나 행동에 거짓이 많고 착실하지 못하며 주색에 빠져 행실이 추저분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는 ’허랑방탕한 삶‘은 하나님이 주신 자원들을 원래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며 망가진 이 땅을 고치도록 하늘의 자원과 땅의 자원을 주신 것인데, 그 생명의 자원을 그릇된 일에,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 “비로소 궁핍한지라”
방탕한 삶은 궁핍한 삶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그가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그 고장에 흉년이 들자 이제는 먹을 양식조차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본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 때, 신자에게 주어진 땅의 자원이나 하늘자원은 모두 고갈되고 맙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방탕하게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기 원하시는 그 자리에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은 가장 영광을 받으십니다. 신자가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는 반드시 하나님을 등질 수밖에 없고, 거기서 궁핍함이 찾아듭니다.
3. 돌아오는 길
1) 죄를 인식함 :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가지고 있던 자원이 모두 고갈된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둘째 아들은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돌아보았고, 비로소 육신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신자가 하나님께 돌아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인식해야 합니다.
2) 겸비함 :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보석과 같이 빛나는 삶을 살았을 것이나, 아버지의 집을 떠나자 아무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신자가 하나님 아버지 집을 떠나면 이처럼 추루한 존재가 됩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죄악을 깨닫자, 자신이 아버지의 ‘품꾼’이라도 좋으니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다는 한없이 겸비한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3) 결단함 : “스스로 돌이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인격적인 아버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을 떠난 자녀들이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돌이켜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방탕한 삶의 길에서부터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 끌어안고 입 맞추는 아버지처럼···.
[ 스펄전과 함께 QT - 2024년 04월 29일 ]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예레미야 17 : 17)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이라고 해서 항상 햇빛이 환히 비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어둠과 폭풍의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 3:17)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인간에게 하늘의 축복뿐 아니라 이 땅의 행복도 안겨 준다는 것 역시 위대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만일 의인의 길이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햇볕이 이따금씩 가려질 때도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는 일정 기간 동안 구름이 우리의 태양을 가리는 바람에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어둠 속을 걸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즐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지 얼마 안 되는 초보 단계에서 햇빛으로 일광욕을 하며 "잔잔한 물가"에 있는 "푸른 초장"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가 그 영광스럽고 환하던 하늘에 구름이 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고센 땅 대신 모래사막을 걸어야 합니다. 잔잔하고 아름답던 물가를 걷는 대신 거친 파도를 넘어야 합니다. 이런 체험을 하게 되면 그들은 씁쓸한 심정이 되어 "내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텐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 지금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절대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성도라면 반드시 쓴 잔도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자녀라면 반드시 십자가도 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어려움 한번 겪지 않고 계속해서 형통했던 성도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성도든 슬픔 없이 항상 기쁨만 체험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여러분이 약하고 겁이 많으므로 하나님께서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부드러운 길에 여러분을 두셨을 것입니다. 금방 털이 깎인 양인 여러분에게 부드러운 바람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영적으로 전보다 더 강건해졌습니다. 따라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어야 할 보다 완숙하고 거친 체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는 그 썩은 가지들을 떼어내고 믿음을 행사하여 그리스도 안에 좀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으려면 세찬 바람과 폭풍우가 필요합니다. 그 재앙의 날에 우리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 J.I패커와 함께 QT - 2024년 04월 29일 ]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전 11 : 6)
성공병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전염병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이것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긴 하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어릴 적부터 늘 성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세상의 통념이 매운 연기처럼 기독교인들 가운데 퍼져 있다.
따라서 그로 인한 괴로운 기침, 폐렴, 호흡 곤란 등에 해당하는 영적 증세가 나타나도 놀라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손댄 모든 일이 성공을 거두었음을 보여 주는 업적들이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당장 승리로 보이는 것이 개인의 성공으로 여겨지고, 당장 재난으로 보이는 일은 실패로 여겨진다.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업적을 이루는 것이 목표가 되고, 그 결과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에 비현실적인 것이 스며들게 된다(1995a:206). ]
묵상: 교회는 업적이 아니라 순종에 의해서 세워진다.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4년 04월 29일 ]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 : 10)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내가 소년 시절 목회자였던 아버지가 감동적인 어조로 이 말씀을 선포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 이 말씀은 내 인생에서 깊은 의미를 갖게 됐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예상하고 두려워 할 때 복음은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진노를 예상하고 두려워하려면 죄를 경멸해야 한다. 죄를 경멸하려면 하나님께서 순결하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담임하고 있는 베들레헴 교회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우리는 모든 족속에게 기쁨이 되며 범사에 으뜸이 되시는 하나님을 열심히 전파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으뜸 되시는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진노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누가 장차 닥쳐올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예수님께 부르짖겠는가? 구원의 복음을 외치지 않는 한, 전도가 되겠는가? 우리는 매일 마시는 세속적인 공기를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끊임없이 정화시켜야 한다. 성경적인 세계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근래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거의 선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신앙에 직결되는 설교 제목이 있을까? 하나님의 진노를 알거나 느끼지 못한다면 신앙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우리의 행복은 겉치장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짜 신자라면, 정말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영혼이 무감각해지는 것을 예방하고자 한다면, 다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 2:5-8).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롬 9:22).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우리도 …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6).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6-17).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9-10).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 은혜와 사명 - 2024년 04월 29일 ]
자신의 인생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명을 낳습니다.
[ 성구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 내용 ]
1931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제인 애덤스 (Jane Adams)는 시카고의 대부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의과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척추에 병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큰 좌절에 빠진 그녀에게 의사는 휴양 차 여행을 떠나 볼 것을 권했고, 이에 그녀는 유럽 여행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런던에서 그녀는 인생의 중요한 계기를 만났습니다. 어느 빈민굴을 방문했다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다.’ 라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서 봉사의 삶을 결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카고 빈민굴의 낡은 집을 사서 빈민의 탁아소, 가출 소녀의 숙소로 삼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헐 하우스(Hull House)입니다. 그녀는 죽는 그날까지 척추의 병으로 고생하였으나, 늘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맡았기 때문이다.” 라고 고백하며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정력적으로 일했습니다.
자신을 향해, “나는 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분명한 목적의식 속에서, 분명한 사명을 붙들고 살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신앙의 회복과 침체를 반복해서 경험하기만 할 뿐, 자신의 사명을 따라 어두운 세상을 고치는 일에 기여하는 일에는 한없이 무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신의 분명한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따라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존재인지를 명확히 깨닫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인생의 정확한 추구점이 있을 때, 분명한 사명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추상적인 구호처럼 들립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이란, 전혀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허울뿐인 목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구체적인 사명이 자신 안에 없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고유의 사명이 아닌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참된 목적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행복하고 안락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또한 성화를 통해 조금씩 보다 완전한 새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그의 존재가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구원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명이 있으며, 그들은 반드시 그 사명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 묵상 ]
올바른 신앙 안에서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 질 때, 우리의 사명도 분명해 집니다. 여러분에게는 올바른 신앙 속에서 확립된 분명한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까?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4년 04월 29일 ]
견인 - 칼빈
1.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이 궁극적인 죽음의 멸망으로 돌진하는 것을 특별한 자비로 막아주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심한 절망적인 불경건으로 끌려가지 않는 것은 그들의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며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의 손을 뻗쳐주시기 때문이다.
2. 우리의 모든 진보와 견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
3. 신실한 언약 그 자체는 하나님 안에서 보장되었고 그 밖의 다른 것에서 보장되지 않았다.
4. 우리 구원의 영원성은 우리들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에 의하여 결정된다.
5. 신앙의 견인은 선택으로부터 나온다.
6. 하나님께서 매일, 아니 매순간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그의 은총으로부터 우리를 따라다니지 않으시면 우리는 견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