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4년 04월 18일 ]
심령으로부터의 섬김 (1)
1. 본문 해설
사도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어떤 마음으로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심령으로 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심령”이란 인간의 정신 작용의 가장 깊은 좌소를 일컫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뿐입니다. 또 더 많은 이들이 무위도식하며 섬기는 일조차 감당치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심령으로 세상과 육신의 정욕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의 모습이란,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인됨을 알고, 자신이 단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섬길수록 완악하고 광포한 사람이 되어갈 수 있습니다. 더 진실해지지도 않고, 성결해지지도 않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섬김 : 심령으로
에스라 시대 70여 년간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신앙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갔으나, 무분별하게 이방 여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신앙이 변질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하는 이들이라도 이처럼 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와 마음이 어떠한지가 관건이 됩니다. 사도는 ‘예수의 복음 안에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겼기에’ 그가 하고 있는 일에서 더욱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복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진전하는 성화의 삶은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와 깊은 관련을 맺습니다. 성경에서 증거하듯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세상에서 분투하는 삶을 사는 동안 하늘나라 소망이 더욱 영글어 갔습니다. 그 섬김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진실하게 섬기는 삶이었고 따라서 성화에 현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3. 구원의 은혜로 섬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의 의미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복음으로 인해 혜택을 받았다는 사도의 인식은, 우월한 자만심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인식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죄인이기 때문에 그가 이루어냈던 성공적인 복음 사역도, 헌신적인 섬김들도 그의 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구속의 감격 안에서 그 은혜에 대한 감사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와 같이 구속의 감격이 있을 때 심령으로부터 섬김을 다할 수 있습니다. 심령에서 흘러넘치는 신령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섬김을 감당할 때, 그 사람 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 성령이 그를 위해 봉사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도 그만큼 섬기지 아니하면, 소극적 의미로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시금석은 섬기고 있는 일 때문에 아픈 마음으로 울어 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에 있습니다. 섬기는 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하나님께 전수받은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은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의 영이 봉사의 영입니다. 미련한 이들은 하는 일없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이들입니다. 섬김의 갈망 없는 이들이 은혜를 구하는 것은 외식일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영혼으로 섬긴다면, 그 안에 주신 하나님의 영이 그를 섬길 것이다’라고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4. 겸비함으로 섬김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의 모든 일이 운수대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막힘이 없다면, 우리가 과연 겸비한 마음을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간구할 때 영혼을 더럽히던 세상 욕심과 죄악의 찌꺼기들이 깨끗이 씻겨 나갑니다. 그렇게 심령으로 섬기면 주께서 세상 자원을 풍성하게 공급하여 주시며 우리를 주인공으로 드셔서 하나님 역사에 사용하십니다.
[ 스펄전과 함께 QT - 2024년 04월 18일 ]
“라합이……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여호수아 2 : 21)
라합이 그 생명을 보존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 정탐꾼들이 한 약속, 그녀가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본 그 정탐꾼들이 한 약속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단순하고 확고하면서도 아주 순종적이었습니다. 창문에 붉은 줄을 매는 그 행위 자체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을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지켰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 혹시 여러분을 위한 교훈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 동안 여호와의 명령 중 본질적으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 뜻에 주의를 기울였습니까? 신자들이 지켜야 할 성례전인 세례와 주의 만찬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준수했습니까? 만일 그 동안 이 규례들을 등한시했다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그 뜨뜻미지근한 불순종의 영을 책망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십시오. 이제 이후로는 모든 일에 있어서 흠 없는 자가 되십시오. 만일 줄을 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그 명령까지 순종할 만큼 흠 없는 자가 되십시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라합의 행위는 이보다 더 엄숙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까? 그 신뢰감이 절대 없어지지 않도록 창문에 붉은 줄을 매었습니까? 혹시 그 피와 그 피의 복된 능력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보지 않고도 여러분의 죄의 사해 바다나 소망의 예루살렘을 내다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면, 그 색이 눈에 확 띄므로 지나가는 사람이 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붉은 줄 때문에 여러분의 생명을 구하고 그로 인해 모든 구경꾼들에게 대속의 효험을 분명히 나타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뭘 부끄러워하십니까? 사람들이나 마귀가 그것을 보고 싶어 한다면 보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 피는 여러분의 자랑이요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이 약해서 그것을 볼 수 없을 때조차 그 붉은 줄을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보수자되신 여호와께서 그것을 보고 여러분을 넘어가실 것입니다.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라합의 집은 그 성벽 위에 있었으나 끄떡없이 서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본성은 인간성이라는 벽 안에 건설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에게 멸망이 임해 그들을 때려눕힌다 해도 여러분은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창에 그 붉은 줄을 다시 매고 평안히 쉬도록 하십시오.
[ J.I패커와 함께 QT - 2024년 04월 18일 ]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고전 1 : 12, 13)
교회 안에 분열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영적으로 병들었음을 말해 준다. 왜 이런 분열이라는 병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사탄과 죄 때문에 존재한다.
사탄은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망치려고 시도한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연합시키기에 바쁘신데, 사탄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탄은 가족을 나누고, 몸을 분열시키고, 동료 의식을 파괴한다.
그러면 죄는 어떠한가? 우리의 불완전하게 성화된 성품 속에 있는 죄는 분열을 일으키려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아담과 하와를 서로 이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이게 했다.
아, 죄의 충동은 방심할 때마다 여전히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마땅히 이루어야 할 연합을 이루는 데 실패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뉘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1985a:38).
묵상: 사탄은 분열시키지만 하나님은 한데 모으신다.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4년 04월 18일 ]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신 33: 26)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대담한 주장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에베소서,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9)라고 가르쳤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동일한 시민이 되거나(엡 2:11-19), 이스라엘에 접붙임(롬 11:17-25)됨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 속해 있으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이라는 것이다(갈3:29).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갈 3:16)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뜻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이라는 것이다(갈 3:29, 16).
그렇다면 바울은 구약을 새롭게 해석했단 말인가? 아니면 본래 구약의 가르침이 그러한가? 구약은 이방인도 참 유대인이 될 수 있고 혈통으로 유대인인 자가 참 유대인이 안 될 수도 있다고 가르치는가? 우리가 구원받은 근거는 우리가 이스라엘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가르친다. 바울이 구약을 잘못 해석했다면 문제는 커진다. 바울은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 리 없다.
창세기 17장 18-25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고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8-19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단지 아브라함의 혈통만 가지고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리브가도 쌍둥이를 낳았는데 에서가 아닌 야곱이 유업을 이었다(창 25:23, 롬 9:10-13).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9장 8절에서“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레위기 26장 41-42절은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라고 말하면서 유대인들이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2장 29절서 지적한 것처럼, 비록 혈통으로는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심령이 변화하지 않으면 약속에 따라 유업을 이을 수 없다.
신명기 10장 16-17절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라고 명령했다. 하나님께서는 혈통이나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이 할례를 받았는지 보신다. 예레미야서 4장 4절도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라고 말한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지 않으면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의 분노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25절에서 마음이 할례 받지 못하면 유대인의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예레미야서 9장 25-26절은“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말한다. 이 민족들은 양피 대신 관자놀이의 머리를 짧게 깎아 단지 할례의 모양만 냈다. 놀랍게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이방 민족과 같은 부류로 취급했다. 왜냐하면 마음이 아닌 육체에 행한 할례는 이방인들이 머리털 깎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할례는 무할례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로마서 2장 25-29절에서 구약을 잘못 해석 한 게 아니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이 가르친 대로 참 유대인에 대한 교훈을 이끌어내려 했다. 참 유대인이란, 육체적 할례를 행한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할례를 행한 사람이다(신 30:6).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다(갈 3:7, 29).
그러면 이 진리는 어디에 적용할 수 있는가? 바울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할례의 역사를 고찰하기 위해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성도들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겸손한 마음과 소망을 가지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는 당시 이방인 형제들이 이스라엘에서 사역을 할 때 교만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래서 이방인 형제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던 것이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8).
우리 이방인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늦게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통 상속인과 똑같이 사랑받게 되었으므로 겸손한 가운데 소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구속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게 되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 이것이 구속의 목적이다.
[ 은혜와 사명 - 2024년 04월 18일 ]
모든 섬김엔 거룩이 배어 있어야 합니다.
[ 성구 ]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 내용 ]
하나님께서는 제사에 관한 규례를 알려 주시면서 반드시 소금과 함께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명령을 내리신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소금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소금이 썩지 않게 보호해 방부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성경이 그리스도인을 두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마 5:13) 라고 말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의 부패 방지와 사회 개혁에 기여하라고 당부하는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해석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소금은 언제나 거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거룩은 본질적으로 오직 하나님만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이 원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외의 것들이 거룩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본성으로부터 말미암아 흘러나온 어떤 것 때문에 그 연관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리스도인을 두고 소금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룩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금이 의미하는 바가 거룩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모든 예물에 소금을 더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눈이 떠지게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물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깊이 사랑하는 우리의 반응적인 거룩이 우리 예물에 깊이 배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삶에 구석구석에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거룩이 깊이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섬김 그 자체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포장지에 쌓여있는 거룩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소금 없이 예물을 드리고 있다면, 거룩 없이 그저 꾸역꾸역 섬기고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나는 너로부터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 너는 내가 열납할만한 예물을 바친 적이 없구나.” 말씀하실 것입니다.
잠시 등 붙일 시간도 없이 고단하게 섬기고 계십니까? 그러나 우리가 코피가 터지도록 열심히 섬기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섬김을 받으셔야만 할 이유일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를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예물만 있을 뿐 소금은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거룩 없이 열심만 있는 것은 아닌지…….
[ 묵상 ]
거룩이 배이지 않은 헌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모욕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부자이시고, 우리와 비교할 수도 없이 전능하십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예물을 요구하시는 것은 스스로 부족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예물 속에 깃든 거룩을 받으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4년 04월 18일 ]
마지막 설교를 앞둔 죠지 휫필드의 기도
...... 주 예수여,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 가지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다시 한번 들판에 가서 당신을 위해 말하게 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인치게 하신 뒤, 죽어 본향으로 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