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4년 05월 21일 ]
금보다 귀한 연단
1. 시련, 원치 않는 사물의 질서
우리의 인생이 원치 않는 질서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환난, 시련 혹은 고난이라 부릅니다. 베드로 사도는 로마의 박해를 앞두고 그의 양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시도는 교회가 원치 않는 질서 속에 놓이기 전에 그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지혜를 이루어 가시는 방식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분의 지혜에 기초하여 이루어집니다.
(1) 사랑으로 이루심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한 사람의 성화된 신자로 만들어 가시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 사람의 삶의 세세한 부분이 운명처럼 정해져서 그렇게 살도록 강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지혜의 경륜이 어떠한지 배우고, 그 지혜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 사는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2)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심
하나님께서 지혜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지만,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를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이성의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가 확실한 사실 하나만 붙들면 그 한계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의 추론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을 만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이런 연단의 때에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내 인생에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하는 시련
하나님께서 고난을 도구로 우리 삶에 간섭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대를 따라 우리가 변화될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4. 영원을 생각하는 지혜
그래서 신자는 시공에 매인 고난이라는 질서가 주는 표상에 현혹되지 말고, 영원의 시각으로 고난을 조명해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지혜는 변치 않는 진리의 빛으로 모든 사물을 보는 정당한 관점과 척도입니다. 이것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깨달은 진리에 삶을 합치시키려고 노력할 때 지혜가 증진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지혜롭게 살아야 하는데 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지적인 품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더러운 욕망, 인격적 결함, 불신아, 교만 등의 본성적 질병을 모두 고쳐서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택하신 도구가 바로 고난입니다.
신자는 시련의 때에 표상에 얽매여 오락가락하지 말고, 변치 않는 진리를 붙들고 영원을 생각하는 지혜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 값진 지혜를 소유한 자만이 시련 중에도 소망을 붙들고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스펄전과 함께 QT - 2024년 05월 21일 ]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베드로전서 2 : 3)
“……맛보았으면"-그렇다면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맛보았으면"-이것은 즉 어떤 이들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못했을 가능성과 개연성도 있다는 뜻입니다. "……맛보았으면"-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베풀어지는 일반 긍휼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특별 긍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알고 있는지의 여부도 한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은혜에 관한 한, 우리 마음속을 살펴보지 않아도 되는 은혜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알아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만약 자기가 정말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는지 그 점에 대해 미심쩍을 경우에는 절대 그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물론 거룩한 질투심에서 나오는 자아 불신 때문에 성도의 마음에서도 그런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의심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마음속에 있다면 그 의심은 아주 악한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믿음의 팔로 구세주를 꼭 붙잡고 “나는 내가 지금까지 누구를 믿어 왔는지 압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주님이 나의 이 믿음을 지켜 주실 수 있다는 사실도 압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전에는 절대 안심하고 쉬지 말아야 합니다.
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서 갖고 있는 권리를 완전히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절대 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영 안에서 증거 하는 성령님의 그 무오한 증거에 의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얻을 때까지는 절대 만족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마"라든가 "어쩌면"이라든가 "글쎄"라든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만으로는 안 됩니다. 절대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영원한 진리 위에 서십시오. 진실로 그 위에 서십시오.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얻으십시오. 그것을 분명히 얻으십시오. 여러분의 닻을 저 세상의 것에 던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이 절대 끊어지지 않을 밧줄로 그 닻과 연결되었는지 보십시오. "글쎄"라는 황량하고 울적한 의심의 단계를 뛰어넘어 앞으로 전진 하십시오. 더 이상 의심과 두려움의 광야에 거하지 마십시오. 불신의 요단강을 건너 평화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십시오. 비록 가나안 거민들이 아직도 나가지 않고 꾸물대고 있지만 젖과 꿀이 계속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십시오.
[ J.I패커와 함께 QT - 2024년 05월 21일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눅 11 : 4)
하나님은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보시기 위해, 우리를 정기적으로 시험하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강건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이 유익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그것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시험하실 때마다 사탄은 그 상황을 이용하여 우리를 파멸로 이끌려 하기 때문이다.
둘째, 시험의 시기에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압박감은, 마치 암에 걸리는 생각만 해도 두려운 것처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우리의 연약함과 우둔함, 그리고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의 전반적인 취약성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히 이렇게 외친다. “주여, 가능하다면 제발 시험이 없게 하소서!”
시험은 우리의 몫이지만, 어리석은 자만이 그것을 원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시험이 닥칠 때 악으로부터 구해 주시고, 시험을 통과하여 천천히 나아갈 때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는”(유 24절)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말라(1994a:196, 198).
묵상: 시험을 의식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시험을 의식하고 있을 때에는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4년 05월 21일 ]
60세가 넘어서도 경주에 나갈 수 있는가?
엘시 뷔렌(Elsie Viren)은 베들레헴 감리 교회에서 62년 동안 (1929-1991) 선교 사역을 위해 직원으로 봉사했다. 그녀는 그리스도와 당신의 몸 된 교회에 충실한 초석이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골반 부상으로 베들레헴 교회 옆 오거스타나 요양원에 입원했다. 기억은 감퇴하고 눈은 침침했지만 심방을 가면 사람을 금방 알아보고 쾌활하고 예의 바르게 감사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녀가 죽기 얼마 전 나는‘영혼의 올림픽’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성경은 ‘경주를 달린다’(히 12:1) ‘허공을 치지 말라’ (고전 9:26)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후 4:7) ‘내 몸을 치다’(고 전 9:27)라는 운동과 관련된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엘시 같은 노인도 달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마라톤 선수도 아닌 그녀가 어떻게 달릴 것이며 허공을 칠 수 있을까? 체력이 튼튼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늙었든지 젊었든지, 병들었든지 건강하든지 간에 달려야 한다. 아픈 사람도 늙은 사람도 달릴 수 있다. 영적인 경기는 다리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달리는 것이다. 영적인 싸움은 주먹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다. 상대방 선수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불신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 노인이나 환자도 이길 수 있다. 이 싸움은 육신의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절망과 싸우는 싸움이다.
이런 주장에 대한 성경적인 논거는 무엇인가?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라고 훈계했다. 이 싸움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병상을 걷고 일어나려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싸움이다. 이 싸움은 젊음의 근력을 계속 지키려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려는 싸움이다. 이 경주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하는 시험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골반이 부스러지고 시력을 잃고 기억력이 감퇴된 상태에서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자는 싸움이다. 이 경주는 병상에 누워서도 달릴 수 있다. 사실 마비된 사람이 신체가 온전한 사람보다 더 잘 달리고 더 잘 싸울 수 있는 경주다.
사도 바울은 다시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말한다.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는 것은 믿음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기는 노화 방지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불신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또 다른 측면은 이 싸움이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굳게 지키는 싸움이라는 점이다.
골로새서 1장 22-23절은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라고 말한다. 경주를 마치는 것은 복음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주는 완전해지려는 싸움이 아니라 절망에 대한 싸움이다. 병실에서 마지막 경주를 달리고 있는 병든 노약자에게 우리는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 10:35)라는 성경 말씀으로 격려해야 한다. 결승선은 인간의 체력으로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쓰러져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순간에 통과하는 것이다.
기억하자. 영적 경주는 혼자 뛰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다함께 뛰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 경주의 규칙이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3).
노인이 정신과 기억력이 감퇴될수록 우리는 그에게 성령의 검을 쥐어주면서 그를 위해 그와 함께 싸워야 한다. 형제 중에 죄를 짓는 자는 자비와 온유함으로 미혹된 길에서 떠나게 해야 할 것이다(갈 6:1, 약 5:20).
마음이 약한 형제는 권면하고 힘없는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살전 5:14).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과부들을 돌봐주어야 한다(약 1:27).
우리가 이렇게 도와줄 때 형제자매들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경주를 마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엘시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없는가? 그 사람이 혼자 싸우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육신을 입은 우리 역시 언젠가는 병상에 누워 성경도 못 읽고 기도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누가 우리 팔을 붙들고 우리 손에 성령의 검을 쥐어주겠는가? 누가 마지막 경주까지 도와주겠는가?
[ 은혜와 사명 - 2024년 05월 21일 ]
우리 인생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께 덜미 잡힌 삶 속에 있습니다.
[ 성구 ]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 35:9)
[ 내용 ]
저는 20세에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배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내 인생이 이제는 내 계획표대로 진행이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계획표에 스스로 빽빽이 예정표를 써 넣어도 알 수 없는 손이 나타나서 하나씩 지워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인생 가운데 한두 번이 아니라, 매번 계속되었습니다.
내가 작정해 높은 계획표 가운데 정답은 하나도 없고 전부 틀린 것뿐이고, 그렇게 내 인생의 계획표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마구 줄을 그어 버리고 당신이 원하는 스케줄을 써 놓으시는데 그것은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계획 하나가 죽죽 그어질 때마다 제 가슴은 마치 예리한 칼로 그어짐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내 인생의 계획표를 휴지로 만들어 버리고 당신의 마음대로 새로 쓰시는 그분과 관계를 끊으면 될 텐데 어린 믿음에도 그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마음으로 이렇게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하늘에 계시면서 이 땅에 있는 제 인생에 그런 식으로 작대기만 긋고 계십니까? 정 그렇게 살게 하고 싶으시면 당신이 직접 내려오셔서 사시지 무슨 권리로 제 인생의 구역에 침범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는 데는 불과 며칠 안 걸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여러 사람들에게 고백했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실수는 예수님께 덜미 잡힌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몇 년의 세월 속에서 신앙이 자라면서, 저는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마음대로 살수 없도록 나의 삶에 오셔서 나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포로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가는 것일까?
이제 저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매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저는 하나님과 저만이 아는 사랑의 줄에 매여 설교자가 되었고, 경건 서적을 쓰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노예로 살아가는 삶이 저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는 삶의 행복을 정녕 맛보고 계십니까?
[ 묵상 ]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이 모르는 아주 특별한 행복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매여 살아가는 행복입니다. 이 놀라운 행복을 여러분은 누리고 계십니까?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4년 05월 21일 ]
두 가지 긴요한 지식 - 존 칼빈
하나님에 대한 지식
John Calvin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
참되고 근본적인 지혜는 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지식의 이와 같은 두 갈래는 한 편이 다른 편을 선행(先行)하기도 하고 산출(産出)하기도 할만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나 그것을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첫째로 아무도 자기 자신을 살펴볼 수는 없는 까닭이다. 차라리 사람이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는 근원(根源)이 되는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는 일에 속히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행17:28). 또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능은 우리 자신의 소산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한 까닭이다.
하늘에서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이 은사물(恩賜物)은 우리를 그 원천(源泉)으로 인도하는 많은 시냇물(streams)로 변한다. 우리의 빈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히 풍성함을 명백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처음 사람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빠지게 된 비참한 파멸은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게 한다.
마치 목마르고 굶주린 자처럼 무엇을 보급 받기를 원하게 할뿐만 아니라 또한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을 배우게 한다. 인간은 비참한 세계에 속한다. 따라서 그가 입었던 신적 의상(神的衣裳)이 훼손되었으므로 이 수치스러운 노출(露出)은 인간의 큰 결함을 폭로시킨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지식을 가질 때 자기 자신의 불행을 자각하고 의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무지, 공허, 빈곤, 유약(柔弱), 타락, 부패 등은, 참된 지혜와 굳은 힘과 완전한 선과 흠없는 의를 주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로 하여금 이해하고 용인하도록 한다. 따라서 우리의 불완전성이 오히려 하나님의 완전성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갈망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기쁨과 안일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는 까닭이다. 자기의 참된 상태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자기의 재질에 만족을 느끼거나, 혹은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모르거나 잊어버릴 때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지 않을 자가 누구랴.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탐구에 대한 자극이 될 뿐만 아니라 그를 발견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도움이 된다.
또 한편 누구든지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생각하고 그 다음에 자기의 본성을 고찰하지 않고는 자기에 대한 참다운 지식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 명백하다.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 자신을 의롭고 죄없고 지혜롭고 거룩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의 불의와 비열(卑劣)과 우둔(愚鈍)과 부정(不淨)이 명백히 증명되기까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불손(不遜)한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우리 자신에만 국한시키고 판단의 표준이 되는 주님을 무시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위선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자연적인 경향으로 말미암아 의(義)의 실상태(實狀態) 이외에 어떠한 허위에도 우리는 전적으로 만족을 느끼는 까닭이다. 더구나 우리 안에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극도로 불결한 것일 때에도 그것이 조금도 불결한 것 같이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장 순결한 것처럼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의 반성의 대상을 인간의 부패성에만 국한시킬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검은 것 외에 아무 것도 보지 않던 눈이 약간 희읍스름한 빛이나 갈색을 매우 희다고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연 육체의 감성(感性)은 우리가 영적 힘을 평가할 때에 범하는 큰 과오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된다. 만약 백주(白晝)에 우리가 땅이나 주위에 있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시각이 매우 강하고 관통(貫通)하는 힘을 가진다고 생각하지만 눈을 들어 태양을 직시(直視)하면 눈은 그 순간에 부시게 되며, 찬란한 섬광(閃光)에 어리둥절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상의 물건을 볼 때 그와 같이 관통하는 힘을 가지고 있던 시력이 태양을 향할 때는 몽롱(朦朧) 그것으로 변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정신적 재능을 고려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관찰이 지상의 것에만 제한되는 한 우리 자신의 의와 지혜와 힘에 완전히 만족을 느끼며 우리 자신을 과대 평가하기를 좋아하며, 반신반인(半神半人)인 것처럼 공상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의 본질과 의와 지혜와 권능의 무쌍한 완전성을 상고할 것 같으면(이 완전성을 우리가 본 받아야 한다) 전에는 우리 자신에 있던 것이 의라는 구실 하에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였지만, 이 때부터는 가장 큰 죄악으로 보이게 되며 싫어하게 될 것이다.
지혜라는 명칭하에 이상하게 우리를 기만하던 것이 극도로 우열(愚劣)한 것으로 멸시받을 것이다. 권세 있는 것 같이 보이던 것이 가장 가련하고도 무력한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하나님의 순결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이 우리 속에서는 가장 완전한 것 같이 보이게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