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4년 05월 02일 ]
하나님을 아는 것을 기뻐하심
1. 본문 배경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호세아가 기록한 호세아서의 배경은 북 이스라엘이 놀라운 번영을 구가하며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던 때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부르짖음은 현재적으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며, 미래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고백할 때가 올 것임을 보여줍니다. 호세아는 음란한 아내를 끝까지 참으며 사랑함으로, 음란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기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면, 하나님이 알아주셔야 할 우리 마음이 따로 존재하거나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2. 번영 속의 곤고함
a. 자기 사랑에 빠짐 : 우상, 세상
사람들은 자신 안에 죽지 않은 옛 사람의 본성을 따라 손쉽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 사랑으로 돌아섭니다. 번영은 선한 일을 위한 최선의 환경을 제공하지만, 악한 일을 위한 최선의 환경을 제공하기도 하므로 번영은 때로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인간의 욕망은 번영의 때를 악용해왔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의 신앙은 빛을 잃었고 점점 부패해 갔습니다. 번영 속에서 부패로 치닫는 속도는, 번영을 누리지 못할 때에 비하여 더욱 급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b. 곤고할 때가 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영을 누리다가 하나님을 잊고서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된 결과, 곤고하게 되는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뒤집지 않은 전병◆에 비유하였는데,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이다.
3. 이스라엘의 해결방법
a. 속죄의 제사
하나님께서 속죄 제사를 계시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죄인됨을 고백하고 용서받는 자리로 나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헌제자의 마음이 제사와 함께 전심을 다해 드려져야 가능하므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사 제도가 아니라, 그들 심령의 돌이킴과 변화임을 강조합니다.
b. 헌신의 번제
번제는 그들이 희생의 번제를 드리면서 헌신할 것을 다짐함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케 했던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수단 안에 있는 갱신의 놀라운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 은혜의 수단이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알아가는 일에 연결되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a. 인애(헤세드)
‘인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사랑을 의미하는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은 지고지순한 사랑입니다. 회개하여 마음이 깨끗할 때, 지고지순한 사랑인 인애가 잘 자라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고지순한 사랑, 즉 진실한 참회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순간 예배에 참석한 우리 신자의 마음에서 찾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b. 하나님을 앎
히브리어에서 ‘안다’는 것은 ‘동참하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맥에서 ‘앎’이란 ‘경험적인 앎’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을 늘 기억하고, 늘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붙드는 삶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생각 없이 드리는 예배나 기계처럼 바치는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으로 맞아들여 하나님이 기뻐하실 존재로 변화되십시오.
◆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호 7:8);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신앙 상태를 아래는 다 탔으나
윗면은 생 반죽 그대로인 뒤집지 않은 전병에 비유하였다.
[ 스펄전과 함께 QT - 2024년 05월 02일 ]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요한복음 17 : 15)
본향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이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주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체험하게 될 아름답고 복된 일입니다. 지금은 “선한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주님의 병사들이 잠시 후면 그 싸움을 마치고 주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이 결국에는 그가 계신 곳에 가서 그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당장 이 땅에서 천국으로 데려가 주십사고 기도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여기 이 땅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곤하고 지친 순례자들인 우리는 "오, 나도 비둘기처럼 날개가 달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당장 날아가서 편안히 쉴 텐데"라는 기도를 얼마나 자주 드리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가 다 익은 곡식더미처럼 주님의 곳간에 들여질 때까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손에 맡긴다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장 죽어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가 이 육신에 거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존해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년에 이르기 전에 영광의 기업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는 절대 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종종 무슨 문제가 생기면 죽고 싶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왜 죽고 싶으냐고 물으면 대체로 "그럼 주님과 함께 있게 될 테니까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지만 실은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원보다는 자기들이 안고 있는 그 문제를 제거하고 싶다는 소원이 더 강하기 때문에 죽고 싶어 할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다른 때, 즉 시험의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때도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원을 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세주와 함께 있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쉬고 싶은 욕심에 본향에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이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세상을 떠나고 싶은 것이라면 그것은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삶이 수고와 싸움과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겠다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천국에 갈지는, 즉 언제 “그만하면 됐다"고 말씀하실지, 그때에 관해서는 하나님 손에 일임해야 합니다.
[ J.I패커와 함께 QT - 2024년 05월 02일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롬 15 : 17, 18)
기독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질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우리보다 하나님이 찬양받고 높임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찬사를 받고 자신은 받지 못할 때, 그리고 자신이 찬사를 받고 하나님이 받지 못할 때 당신은 얼마나 만족스러워 하는지 또는 불만족스러워 하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영광이 주어지지 않을 때 만족하며,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때 괴로워한다.
당대에 뛰어난 경건 서적 저술가였던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는 임종시에 방문자들이 그의 책들을 칭찬했을 때 괴로워했다. 그는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펜에 불과했습니다. 왜 펜이 칭찬을 받아야 하지요?” 이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정신 상태를 보여 준다.
즉 성숙한 사람은 매순간 이렇게 외치기 원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오직 그분만이 찬양받으실 만하다!”(1994a:213)
묵상: 나의 삶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4년 05월 02일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 (히 10 : 22)
옛날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청교도들은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과 다르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제일 중요시 여겼으나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때보다 덜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만나면 주로 선교 사업이나 교계 동정, 친지들, 교회운영, 신학 문제 등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눌 뿐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팩커는 청교도 중에서도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을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꼽았다. 오웬이 하나님과 교제한 체험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 본보기다. 오웬과 그 시대에 핍박받던 청교도들의 믿음 생활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오웬은 1674년 병을 앓으면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요 죽은 후에는 유일한 친구가 될 걸세. 나는 다른 일에는 모두 싫증을 내더라도 예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일에는 싫증내지 않게 해달라고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다네.”
하나님께서는 오웬의 병과 스트레스를 통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있게 하셨다. 오웬 역시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가졌다. 그는 “우정은 특별한 일이 없어도 자주 만날 때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바쁜 연구, 정치, 선교 활동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았다. 또한 그는 오로지 간구나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위대함을 묵상하기 위해 그분께 가까이 갔다.
그의 마지막 저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묵상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자기 인생의 결과와 초점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철저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묵상해야 한다.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을 즐기기 위해 복음 가운데 계시된 영광을 늘 묵상하는 것보다 더 좋은 준비는 없다.
오웬이 언급한 묵상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철저하게 생각하는 것과 열심히 묵상하는 것이다.
둘째, 끊임없는 기도다.
이 두 요소는 히브리서에 대한 그의 책에 잘 예시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업적 가운데 하나인 7권의 히브리서 주석 집필을 죽기 얼마 전에 마치면서 “나의 일은 끝났다. 이제 죽어도 좋다” 고 말했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 동안에도 어떻게 그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서문을 읽어보자.
모든 탐구와 독서를 끝낸 지금 기도와 묵상이 유일한 위안이고 빛이고, 치료의 수단이다. 기도할 때, 그리고 묵상할 때 내 생각은 올무에 빠지지 않는다.
이처럼 오웬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빛과 자유함을 얻었다. 하나님과 교제를 갖고 싶어 하는 열심은 지식과 조화를 이룬다. 우리도 이런 열심을 갖자. 이런 지식은 우리의 열심을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다. 이런 지식과 열심으로 항상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자.
[ 은혜와 사명 - 2024년 05월 02일 ]
궁극의 사명은 삶의 상황 속에서 주어지는 개별적인 사명을 따라 충실히 살아갈 때 성취됩니다.
[ 성구 ]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2-24)
[ 내용 ]
교회에서는 매우 인정받는 사람인데, 직장에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야 할 시간에 교회 주일학교 주보를 만들고, 직장 전화로 오랜 시간 동안 심방전화를 하고, 교회에서 철야 기도를 한 날은 지각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하루 종일 졸기만 합니다. 교회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애매히 고난 받고 있다고까지 여깁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감당치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하며 살 수 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그런 애매한 고난을 당하며 살 정도의 의인이 몇이나 되는지는 좀 의문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 활동에만 심취한 무능한 당신의 자녀를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일만 열심히 하면, 다른 일들은 그냥 대강대강 해도 괜찮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고 가르치셨습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 사명은 개별적인 사명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구체적으로 성취됩니다. 개별적인 사명을 다하는데 소홀하고, 수시로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나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은 그들의 삶에 실제적인 힘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보십시오. 거라사의 광인은 모든 삶을 포기하고, 자신을 괴롭히던 귀신을 쫓아주신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눅 8:39). “나를 따르라”고 하시지 않고 “너의 개별적인 삶에서 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그 삶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십시오.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정, 직장, 학교에서 개별적인 사명을 무시한 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허울 좋아 보이는 궁극적 사명만 아무 능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개별적인 삶속에서 주어지는 사명을 최선을 다해 따를 때 궁극적인 사명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 묵상 ]
총체적인 소명이 우리의 삶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소명에 따르는 의무를 성실히 하는 일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소홀히 하고 있는 개별적인 소명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4년 05월 02일 ]
고난 2 - 칼빈
1. 경건한 자들의 비참함은 세상의 모든 즐거움보다 더 행복하다.
2. 잠을 잘 수 있는 평안을 바라는 것보다 불구가 되고 잔죽음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더 좋다.
3. 고난에 의하여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중요하다.
4. 하나님이 우리에게 편안한 보금자리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을 한다.
5.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유순하게 만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고난의 채찍에 맞아 교정되기 보다는 곧 바로 쓰러졌을 것이다.
6.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행복이 어떤 것이든지 그것은 기쁘고 평안한 생활, 아무 해도 받지 않는 보장된 안전에 있지 않고 하늘나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