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4년 05월 18일 ]
오래 참음
1. 본문의 배경
야고보 사도는 5장 전반부에서 부자들에 대해 강경한 어조로 책망을 하였습니다. 이제 본문에 이르러, 사도는 교회에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 지체들을 위로하는 동시에 권면하고 있습니다.
2. 원망하지 말아라
사도는 고통 받는 지체들에게 교회, 지도자, 교회 상황에 대해 원망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고통을 받은 지체들에 대해서도 경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몸의 문신을 지우도 싶어도, 살을 깎아 버릴 수는 없듯이 차별을 하는 자들도 한 지체이기 때문에 참고 화평을 도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더 큰 목적을 위한 참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 우리를 두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질서가 편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질서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속에서는 우리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 모습을 보게 하시기 위해 우리 밖의 질서를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바꾸십니다. 원하지 않은 질서 속에 있을 때, 본성대로 반응하는 자신을 보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음을 발견하게 딥니다. 물론, 진리를 통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가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사람은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해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 마음이 낮아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그 진리를 깊이 깨달을 때 인간의 삶은 변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으면서, 환경의 어려움 없이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질서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분의질서로 돌이키는 삶은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격적인 방법만으로 우리의 악한 본성을 모두 고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난이라는 시금석으로 신자들을 시험하십니다.
4. 고통은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조재인지 보여주시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좋은 신자도 고난이 없이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는 사람이 없고, 고난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본문에 나온 성도들도 그런 부당한 질서를 통해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자신들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고난은 항상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갖고 계신 관심과 나의 모난 성품과 부패함을 순결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증이며 하나님의 애정표현입니다. 고난의 아픔으로 인해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이기에 고통 받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영혼에 직접 내리시는 축복, 일반섭리를 통해 내리시는 축복이 있습니다.영혼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 영혼을 만지시는 축복인데, 이는 가장 고귀한 축복입니다. 고난을 통해 내 영혼을 직접 만지시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면 우리의 영혼은 파괴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여 내가 원하는 질서 곳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속에 고난이 필수 코스라면,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서라도 고난 받는 삶을 기꺼이 택해야 합니다.
이를 악물고 견디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맺히는 것 없이 하나님 한 분 앞에 서서 “하나님 제가 이 시련을 통해 저도 모르는 단점을 발견했습니다. 저를 정결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합시다.
[ 스펄전과 함께 QT - 2024년 05월 18일 ]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골로새서 2 : 9-10)
하나님이자 동시에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속성이 다 우리의 것입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란, 그 기이한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든 아무튼 신성의 모든 충만이 우리를 완전케 하기 위해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실 수는 없었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다 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능력과 신성을 기꺼이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자신의 전능하심, 전지하심, 편재하심, 불변하심, 무오하심, 이 모든 것을 다 사용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서 일어나 그 신성에 속한 모든 것을 구원의 마차에 매고 계신 주 예수님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의 은혜는 얼마나 광대하며 그의 신실하심은 얼마나 확고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의 능력과 지식은 얼마나 무한하며 그의 불변성은 얼마나 끄떡없는지요! 주님은 이 모든 것을 구원이라는 성전의 기둥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 무한한 신성들이 조금도 삭감되지 않은 채 언약을 통해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구세주의 가슴 속에 있는,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사랑 한 방울 한 방울이 다 우리의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의 팔에 있는 모든 힘줄, 그 권능과 위엄의 면류관에 박혀 있는 모든 보석, 그 무한하신 지식, 그 엄격하신 공의, 이 모든 것이 다 우리의 것이며 우리를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 흠모할 만한 특성 속에 담겨 있는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친히 넘겨 주사 우리로 하여금 풍성히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의 지혜가 우리의 방향을 지시해 주며, 그의 지식이 우리를 훈계하며, 그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해 주고, 그의 공의가 우리를 안전히 지켜 주며, 그의 사랑이 우리를 위로해 주고, 그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안위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불변하심을 의지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산 저 깊은 곳을 활짝 열어 보이시며 우리에게 그 속의 금광들을 파서 그 안에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내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너의 것이니 여호와의 선하심과 사랑을 마음껏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 이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의 사랑과 능력으로 개입해 주실 것을 자신 있게 요청할 수 있다니 얼마나 유쾌한 일입니까! 그것은 사실 주께서 이미 신실하게 약속하신 것을 구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J.I패커와 함께 QT - 2024년 05월 18일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 : 10)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해 달라고 간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일에 임할 때, 보통 우리가 하기 원하거나 일어나기 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우리의 뜻이기 때문이다. 또 타락한 세상에서 정기적으로 닥치는 모든 반대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헌신하여 충성을 다하지 않고는 이 기도를 할 수 없다.
루터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오, 아버지, 마귀의 뜻이나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폐하려 하는 자들의 뜻이나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것을 위해 견뎌야 하는 것을 인내로 견디고 극복하여서 우리의 보잘것없는 육신이 연약함이나 게으름으로 인해 패배하거나 쓰러지지 않게 하소서”(1994a:179, 180, 216).
묵상: 나는 기꺼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뜻을 나의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일어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둘 다 최선임을 믿음으로 아는가?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4년 05월 18일 ]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 히 6 : 17)
대부분 휴가 때 더 낙심할 가능성이 높다. 기대는 큰 반면,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네소타 주의 2월은 음울하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정작 추수 감사절, 크리스마스, 생일, 각종 기념일 등에는 축제 분위기여야 하는데 이런 때일수록 더 크게 낙심할 때가 많다. 이런 경우에 실망을 예방할 수 있는 처방으로 위의 말씀을 묵상해보라.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이미 충분히 말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소한의 의무만을 이행하거나 최소한의 다짐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나는 이런 일을 좋아한다. 다음에 또 해야지” 라고 스스로 말씀하신다. 그런 다음 위안의 말씀을 더 주신다. 그러나 단순히 더 주시는 것만이 아니다. 더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을 맹세로 보증하신다. 그 맹세는 하나님 자신을 걸고 하시는 맹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분의 말씀이 미덥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약하고 인내할 줄도 모르고 기다릴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증명해보이고, 지적해주고, 전시해주고, 밝혀주고, 납득시키기 위해 열망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납득하고 위로받기를 열망하신다.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아 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열망하신다.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얼마만큼의 위로인가?‘ 큰 위로’다. 큰 위로라 함은 일시적 진정제가 아니다. 오늘 각자 자신에게 다짐하자. 하나님께서는 내게 큰 위로를 주시기를 열망하신다.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살다보면 좋을 때도 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자. 세상은 악하고 우리는 불완전하다. 나이는 많이 들었고, 죽을 때는 가까워 온다. 우리가 이 세상만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고전15:19). 죽기 전까지 좋을 때가 남아 있기는 하겠지만 몇 번이나 되겠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죽어 그리스도를 얻는 유익에 비하면 세상에서 좋다는 것은 한낱 쓰레기에 비유될 것이다(빌 1:21).
이 세상에 살 동안에도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소망을 갖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 소망을 붙잡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 소망을 붙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소망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보장되어 있다.
[ 은혜와 사명 - 2024년 05월 18일 ]
나의 원대한 꿈이 실현되는 것이 사명일 수 없습니다.
[ 성구 ]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전 5:7)
[ 내용 ]
세계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한 때, 구두수선공으로 일하였습니다.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그 당시 구두수선은 유망직종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평생 신발만 어루만지다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1779년 캐리가 19살 때, 한 기도모임에서 히브리서 13장 12~13절 말씀을 듣고, 깊은 감화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는 이 한 말씀을 통해 그동안에 세상과 타협하며 살던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과 능욕을 받고자하는 분명한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케리는 이런 은혜를 받은 후에 그리스도를 모른 채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연민한 나머지 구두를 만들고 남은 가죽으로 지구본을 만들어 매일 품에 안고 잠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을 결단했을 때 그의 비전이 선교의 역사를 새로 쓰는 것이었습니까? 그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깨닫는 일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평생을 이방인 선교를 위해 헌신했지만 그를 사로잡고 있던 꿈은 이방인 선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헌신된 삶으로 이끌었던 것은 그가 경험한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세계 선교 역사를 보십시오. 선교를 위해서 놀랍게 헌신했던 사람들은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깨달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겐 먼저 하나님의 사랑의 어떠하심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깊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알기 전에 갖고 있던 원대한 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과는 상관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헌신으로 이끄는 삶의 열정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가진 성취욕에서 비롯된 커다란 꿈, 혹은 남다른 박애정신에서 비롯된 숭고한 희생의 삶이 실현되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대한 성공일는지 모르나 우리 각자를 향한 고유한 목표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원대한 포부를 갖는 일에 신중하십시오. 구원의 은혜에 사로잡힌 내적 강제력이 이 일을 하도록 시키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 묵상 ]
여러분이 요즘 가장 열렬히 매달리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어떤 정신을 갖고 헌신하고 계십니까? 구원의 감격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지 않을 수 없는 강제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시키는 일을 하십시오.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4년 05월 18일 ]
잠시 버려둠에 주목할 만한 원인 - 크리스토퍼 러브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예배와 경외심을 상실한 상태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서 참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법칙은 영적인 일에서도 적용됩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 만약 우리가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성령님의 평안케 하시는 일을 보류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이 말했듯이, 게으름장이는 가난한 것이 마땅하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잠 10:4);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거룩한 의무에 대해 게으르고 점점 나태해진다면, 우리들에게 있는 위안은 점점 부패해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