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4년 05월 10일 ]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라
1. 본문의 배경
본문은 이스라엘의 사사시대가 끝나고 첫 왕 사울이 등극한 이후를 배경으로 합니다. 왕 사울은 점차 교만하게 변질되어 하나님을 근심케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새 왕을 세우시기로 작정하시고,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이새의 일곱 아들들의 외모만을 보고 기름 부으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택하신 자는 형들의 외모에 못 미치는 막내 동생 다윗이었습니다.
2. 영혼의 아름다움
“중심”이란 ‘마음, 심장’을 가리킨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하셨습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자, 그 마음을 뒤따라가는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기능은 영혼이 만들어내는데, 인간 존재의 귀중함과 비천함을 가르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름다운 마음은 아름다운 영혼이 투사된 것이니, 영혼과 마음은 분리되지 않으며, 영혼의 아름다움은 마음의 아름다움을 통해 아름다운 삶으로 구현되는 것입니다.
a.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을 이루는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보편적 질서의 아름다움입니다. 천지 창조 이전 삼위 하나님 안에 아름다움이 존재하였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감각을 넣어주셨습니다. 천지 창조는 아름다움의 원 틀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사물이 창조의 계획된 자리에 존재하여 전체의 아름다움에 기여할 때, 그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영혼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하나님 ‘아래’의 자리이며, 또한 그 자리에 부여된 의무로써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을 다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개별적 존재의 아름다움입니다. 시든 꽃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는, 꽃의 ‘완전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회심하여 거듭난 존재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하였기 때문에 존재가 아름다워집니다. 영혼의 개체적 아름다움이 완전성을 회복해야(지순의 사랑으로 가득차야) 인간이 참 인간되는 전일성이 회복됩니다.
b. 아름다움과 행복
하나님은 아름다운 영혼에게 말을 거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교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이 아름다움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을 이룰 때, 영혼은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과 세상의 자원을 구하는 것은 목마를 때 소금을 찾는 것과 같아서, 구할수록 더 우리를 목마르게 합니다.
영혼이 깨끗하고 아름다울 때는 죄에 대한 사랑이 깨뜨려지고 지순의 사랑으로 가득했을 때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아름다움의 원형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행복 이외에 다른 곳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악으로 치닫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은 사랑을 세상으로 흘러넘치도록 작용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질서를 세워나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은 한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3.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길
a. 아름다운 상태가 변함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게 하신 자리에 있습니까? 불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신 자리를 이탈하면, 기도할 수 없고 말씀에서 은혜 받지도 못합니다. 명하신 자리에 있다 해도, 지순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으로 가득하면, 영혼의 부패함이 인간의 본분을 이탈하게 만듭니다. 인간 영혼의 온전함과 지정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울러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b. 아름다움의 회복
영혼의 아름다움의 근원은 영혼이 붙들고 있는 진리에 있습니다. 영혼이 진리를 붙들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진리를 인식해야 합니다. 진리를 인식하고 파악하려고 노력하십시오. 두 번째로 인식한 진리의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즉, 진리를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의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깨달은 진리를 자신의 존재와 삶속에 적용하려고 끊임없이 애써야 합니다.
[ 스펄전과 함께 QT - 2024년 05월 10일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고린도전서 15 : 20)
기독교의 전 체계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며 또 우리 믿음도 헛것이기"(고전 15:14)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확실하게 입증하는 것은 바로 그의 부활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기"(롬 1:4)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주님의 신성을 의심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말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주권도 그의 부활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목적을 위해, 즉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시려고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가장 좋은 축복인 우리의 칭의 역시 사망과 무덤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기"(롬 4:25) 때문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더 있습니다. 우리의 중생 자체도 실은 주님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부활할 것을 가장 확실하게 지지해 주는 것도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부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멸망치 않고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서 하나님을 분명히 뵐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모든 축복, 즉 중생에서부터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축복을 꿰어 한데 묶어놓은 실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이 영광스러운 사실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치 말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일으키심으로 그 약속이 성취되고 구속 사역이 이루어졌으며 공의와 긍휼이 화목되었다오.”
[ J.I패커와 함께 QT - 2024년 05월 10일 ]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 : 8, 9)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 때문에 좌절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 놀랄 필요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단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피조물로써 우리는 모든 면에서 창조주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권리나 이유가 없다.
왕께서는 인간 백성들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모두 알리는 것이 자신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 알 필요가 있을 때에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알리셨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나타내신 바를 우리의 신앙과 삶에 대한 완전하고 적절한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려주지 않으신 것들과 적어도 이 생에서는 나타내지 않으려 하시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 뒤에 감춰진 이유들이 바로 이런 범주에 속한다(1987d:19, 20).
묵상: 피조물이 항상 창조주의 뜻을 이해할 수는 없다.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4년 05월 10일 ]
믿음이 은사라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양한 분량으로 믿음을 주신다고 앞에서 읽었다. 이 교훈을 믿으면 사역할 때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께 은혜를 주실 것을 지속적으로 간구하게 된다. 반면에 믿음을 선물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칫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믿음으로 사역을 담당해야 하는데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기 때문에, 나는 할 일이 없으므로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면 되겠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생각은 비성경적이며, 로마서 12장 3절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로마서 12장 6-8절의 요지는 그런 생각과 정반대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받은 은사는 잘 사용해야 하며, 그냥 묻어두면 안 된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받은 은사를 열심히 사용해야 된다. 소극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하라.
“주님, 저에게 은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곤함 때문에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주님을 믿는 것이지 은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제게 능력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도우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믿음도 은사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한 모임에서 말씀을 증거 하려고 갑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말씀의 요지가 바로 기도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믿음의 은사는 봉사를 하도록 주신 능력이며, 은사가 봉사를 대신할 수는 없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보면 소극적인 생각이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 그저 놀고먹은 것이 아니다! 수고하게 된 배경을 보라.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은 해보겠다는 의욕을 꺾는 말씀이 아니라 의욕을 고취시키는 말씀이다.
골로새서 1장 28-29절을 보자.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수고를 다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 수고하였다.
말씀의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대신해 행사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의지를 통해 당신의 의지를 행사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할 일을 대신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할 일을 할 때 우리 일을 통해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의욕을 갖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의욕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에 열심히 믿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비성경적이다. 수십 년 동안 사랑의 사역을 마친 인생 말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셔서 많은 불신자들을 회개시켰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일생 동안 당신이 한 수고에 대해 뭐라고 말하겠는가? 자랑할 것이 있는가? 없다. 로마서 15장 18절 말씀을 기억하라.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또한 고린도전서 4장 7절을 기억하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주님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적 은사와 더불어 그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 “큰 분량의 믿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자. 내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발견하자. 그 은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그 은사를 사용하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실 것이고 당신은 기쁨으로 충만함을 얻을 것이다.
[ 은혜와 사명 - 2024년 05월 10일 ]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의 사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성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上)
[ 내용 ]
미국 미네소타 주의 1984년 겨울은 몹시 추웠습니다. 그 해 미네소타 주는 섭씨 영하 34도까지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곳에 브루클린 파크 감리교회가 있었는데, 그 해 어느 주일, 날씨가 너무 추워서 평소의 절반 정도만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에 88세의 한 할머니가 출석하고 계셨는데, 그렇게 추운 날, 할머니는 직접 운전하여 100세의 어떤 노인의 집에 들러 그를 차에 태우고, 다시 94세의 걷지 못하는 친구의 집에 가서 그를 태우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그 할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며 "할머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주일에 많은 성도들이 출석하는 것도 좋지만 할머니 건강이 너무 염려되네요."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작은 십자가지요. 아직도 목숨을 바친 충성은 못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살도록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그 할머니가 추위와 건강의 위협 가운데서도 그렇게 섬김을 다할 수 있었던 것, 구약의 다니엘이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루 세 번 기도하던 것을 멈추지 아니하였던 것,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서 마지막까지 사역을 계속하였던 것, 모두 그들의 심장에 십자가로의 부르심이 고동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좋다.”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쏟으신 물과 피가 그저 우리의 느낌을 위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이 됩니까?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구원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설 때 구원의 은혜로 감격함은 물론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부담은 사명이 되어 일평생 헌신하며 살 동기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자들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생명이며, 생명이 있는 자는 사명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 묵상 ]
십자가 앞에 서서 흐르는 주님의 눈물과 피를 대하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십자가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상을 위한 감정적 매개물이 아닙니다. 그 앞에서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게 될 때, 왜 이러한 은혜가 나에게 주어졌는지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은혜에 대해 무언가 보답하고 싶은 마음의 부담은 그대로 사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사명을 깨닫게 되는 원리입니다.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4년 05월 10일 ]
경제 활동에 대한 4가지 원칙 - 윌리엄 퍼킨즈
1.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회계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들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 부자는 필요하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과감히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부를 소유하지 못한 것처럼 재물을 챙기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3. 복음 전파나 핍박당하는 자들이 있을 때, 고통가운데 있는 형제들을 구제해야 하는 상황을 접하게 될 때, 그러한 일들을 위하여 우리의 소유를 과감히 투자해야만 한다. 그러한 것들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간주하였다.
4.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