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을 분별하는 시금석
디모데는 믿음의 말을 쓰겠지 허튼 구전의 말은 쓰지 않을 거야 그러나 비유 사용을 금하지 않은 바울은 그 안에 진주와 보석을 조심스럽게 숨겼다 ─ 존 번연(John Bunyan)
선한 시심은 진리를 말한다. 시는 행마다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물론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고전 13:12)하기는 하다. 인간은 유한하고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빛을 보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이 짧은 인생에 어두운 지점을 끈기 있게 바라보면서 빛으로 나가기를 기도할 때 어떤 빛이 비추어질까? 보통 사람은 성경에서 어려운 낱말과 긴 이야기를 만나면 너무 빨리 훑어보고 지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 어두운 부분에서 움직이지 않고 정지한다. 그는 그 부분에 대해 분노했다가 울다가 읽다가 한다. 그리고 나서 바늘 끝 같은 빛줄기를 발견하고 이것을 불완전하게나마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고통 속에서 시를 쓴다. 배가 고파 어머니가 아들을 삶아 먹는 황폐한 도성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예레미야처럼 시를 쓴다. 수염은 뽑히고 옷은 찢기고 목은 쉬었다. 그 다음에 남은 일은 무엇인가? 애가라고 불리는 시를 쓰는 일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하나님의 자비가 매일 아침 새롭고 주님의 미쁘심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예레미야애가는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2장 및 4장은 22개 연으로 되어 있는데, 매연 첫 글자가 히브리 알파벳순으로 시작되는 이합체 시 형식의 고통의 시가 펼쳐진다. 3장은 고난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계속 신뢰한다는 내용으로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22개 연으로 되어 있으나 각 연은 3개 행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 연은 같은 히브리 알파벳 글자로 시작된다. 5장은 22행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합체 시는 아니다.
시인은 왜 이런 형식으로 시를 썼는가? 고통이 심한 현실로 인해 이런 형식을 취하게 됐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 어려운 시 속에 영혼을 담아놓으려고 애쓸 필요가 있었을까? 왜 고통스러운 수고를 사서 했을까? 이 시는 마음속에 새긴 증거다. 존재하는 것은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우리가 그렇게 느껴서도 아니고 그렇게 하시기를 바라서도 아니고 그렇게 하시기를 강요해서도 아니다. 그분은 그저 스스로 계신 분이다. 우리는 변경할 수 없는 이 사실 범위 내에서 시를 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애써서 하나님을 보고 또 보고 느낀 것을 시의 형식을 빌려 표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진리를 증거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객관적 사실의 실체다. 그분은 우리의 시가 감정에 이기지 못하고 진리에서 떠나 표류하는 것을 붙잡아주시는 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옷을 입고 계시는지 볼 수 있다. 그분은 부동의 실체로서 감정에 못 이겨 위험한 곳으로 흘러가지 않게 붙들어주시는 분이다.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을 때 우리 역시 고통스러운 갈보리 훈련을 통해 시나 산문을 써야 한다는 당위가 생겼다. 그리스도는 허황된 가식의 시를 쓰는지 아닌지 분별하는 시금석이다.